마르셀 뒤샹의 레디메이드(ready-made) - 샘 Fountain

이상애와 함께하는 미술여행

2019-04-04     이상애 미술학 박사

1917년 뉴욕의 한 전시장에서 <독립미술가협회>가 주관한 한 전시회가 열렸다. 이 전시회에 2126점의 작품이 출품되었는데, 그 중 단 한 점의 작품만이 전시가 거부되었다. 그것은 바로 마르셀뒤샹의 <샘>이라는 작품이었다. 뒤샹은 소변기 설비업체인 J.L.Mott사의 기성품에 자신의 이름이 아닌 `R. Mutt 1917'이라고 서명한 후 90°로 뒤집어 출품하였다. 전시가 거부된 이유는 공장에서 생산된 기성품에 단지 예술가의 서명만이 있는 물건을 당시 미술제도권의 미학적 기준으로는 예술 작품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뒤샹은 무슨 배짱으로 이 유쾌하지 않은 변기를 감히 예술의 신전 위에 올려놓았을까? 그의 선택에 의한 레디메이드는 어떻게 예술 작품으로 소통될 수 있을까? 뒤샹의 의도를 읽는 것이 현대미술을 이해하는 단초가 되리라 본다.

전혀 미학적 연상이 일어나지 않는 이 소변기는 한마디로 왜 예술은 아름다워야 하고 감각적이어야 하는지, 왜 인간은 누군가 정해놓은 미적 토대를 학습하고 그것을 반복하는지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뒤샹은 예술은 `미'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 사유하는 것이라 보고, 예술은 눈의 망막에 의한 재현이 아니라 정신과 마음으로 소통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이것은 허위의 너울을 쓴 기성 미술의 절대적인 권위에 대한 도전이자 예술 작품 개념에 대한 해체였다. 그의 <샘>은 `이것이 예술이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왜 이것은 예술이 아닌가?'라는 역설적인 사유로써, 예술을 구분하는 판단기준에 대한 반문이다.

화장실에 놓여 있는 소변기는 그 용도에 맞는 장소에 있으므로 소변기라는 데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소변기가 <샘>이라는 예술 작품으로 전시되면 그 변기는 본래의 기능을 잃게 된다. 따라서 뒤샹의 <샘>은 더 이상 변기가 아니다. 이렇게 레디메이드가 예술가의 손에 의해 선택되어 전시장에 놓이면 그 위치가 변용되어 새로운 관념의 대상이 된다. 따라서 관객은 <샘>을 이미 알고 있는 소변기가 아니라 우연히 처음 마주한 대상으로 보아야 한다.

뒤샹의 다다(DaDa)적 제스처는 시한폭탄과도 같은 것이었다. 이전까지의 기존의 미술은 장인적 기술과 유일성이 필수적으로 내재되어 있어야 했고, 예술가의 권위 또한 절대적이어서 평범한 일상의 사물이 미술품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은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의 제스처는 창조자의 위치에서 군림하던 예술가들의 신화에 대한 해체이자 작품 유일성의 해체, 평범한 것의 변용, 아름다움에 대한 전통적인 심미안의 해체였다.

이상애
 

뒤샹의 레디메이드혁명이후 미술계는 커다란 변혁을 맞이하게 되고 결국 미술이란 작가의 행위 없이 선택만으로도 작품이 될 수 있다는 확장된 의미를 부여받게 된다. 이는 오늘날 미술 작품으로 무수히 쏟아져 나오는 레디메이드 오브제들을 보면 극명해진다. 무엇보다도 뒤샹의 해체적 예술이 현대미술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력이란, 무엇이든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열린 가능성일 것이다.

/ 미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