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멜레온화가 게르하르트 리히터(Gerhard Richter, 1932~)

이상애와 함께하는 미술여행

2020-08-14     이상애 미술학 박사
게르하르트
 
 1839년 사진의 발명된 이후 오랫동안 사진과 회화는 포스트모더니즘시대가 도래하기까지 꽤 오랫동안 하나가 될 수 없는 이질적인 매체로 존재해왔다. 이는 재현의 수단으로서의 자리를 사진에게 내어준 화가들이 예술의 창조적 과정과 함께 순수주의의 미학적 자율성을 그 핵심적인 가치로 내세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렇게 미술 고유의 영역을 주장하면서 양식화된 모더니즘 미술은 점차 독단적인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이에 모더니즘의 형식주의에 의문을 제기한 20세기미술가들은 사진기술을 새로운 미술을 위한 적합한 매체로서 적극적인 차용을 시도한다. 1932년 독일 태생의 게르하르트 리히터의 작품은 바로 이러한 ‘재현회화의 위기’에 대한 인식이 유포되고 있었던 시대적 상황에 놓여있었다.
 1960년대에 리히터는 주로 포토 리얼리즘 작업에 매달렸다. 그가 사진에 매료된 이유는 회화와 달리 사진은 양식화를 강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대상을 이해하지 않고, 그것들을 그냥 기계적으로 본다. 사진에는 양식도 없고, 구성도 없고, 판단도 없다. 그러나 화가의 손에 의한 그림은 화가의 눈이 아닌 뇌의 작용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현실을 왜곡시키고 특정한 종류의 양식화로 흘러가 결국 상투화되고 정형화된다. “나는 스타일이 없는 것을 좋아한다. 왜냐하면 스타일은 폭력이고, 나는 폭력적이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그의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그는 어떤 체계나 양식을 추구하지 않는다.
 리히터의 사진을 차용한 작품의 특징은 ‘초점흐리기’이다. 사진을 보고 그리지만 이미지를 흐려버리는 붓질이 가해진 그림은 사진적 사실성으로부터 한걸음 물러나게 되고, 두 매체가 동시에 기용되고 있다는 점에서 사진과 회화 그 어느 쪽으로도 정의될 수 없는 애매모호함을 지닌다. 또한 리히터는 흐리기를 통해서 사진이 지니고 있는 과다한 불필요한 정보를 제거하여 작품 속에 구체화되고 완결적인 총체성을 배척하였다. 말하자면 관람자로 하여금 그 사진이 담고 있는 어떤 의미도 붙잡지 못하게 하여 작품에 최종적인 의미를 유보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무규정적이고 불확실하고 애매모호함은 포스트모던 미술의 주된 특징이기도 하다.
 
 화가는 자신만의 언어를 사용하여 작품 세계를 구축해 나간다. 그러나 그 과정이 지속되는 동안 화가는 다양한 언어를 구사하게 되는데, 이때 언어의 교체는 대개 통시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나 리히터는 모든 예술언어를 공시적으로 사용한다. 다시 말해 다양한 언어의 교체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카멜레온이다.
 리히터는 전쟁과 이념의 대립으로 혼란스러운 시대의 한 가운데서 고정된 양식에 안착하기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예술언어를 바꾸며 다양한 사진적 실험을 시도하여 그 새로운 가능성을 모색해왔다. 그는 사진, 회화, 그리고 다시 사진 작업으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통해 회화에 위기를 가져다준 사진을 재해석하여 오히려 회화의 부활을 가져다주며 포스트모던 시대로이어지는 문을 열었던 것이다.
/ 미술학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