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그랬지

청마담 시골살이

2021-02-06     임현택 수필가
임현택
 

언제부터인가 사진 모음집이 책꽂이 구석진 자리에서 골동품처럼 빛바래고 있다. 명절에 모인 가족들, 앨범을 뒤적이다 오래된 가족사진 앞에 모두가 환호성이다. 저마다 그때의 기억을 끌어올리며 `그땐 그랬지'라며 말끝이 촉촉이 젖어든다.

까마득한 오래전, 마을에 영정사진과 가족사진을 찍는다고 마을회관에 모여 집집이 사진을 찍느라 난리법석이었던 적이 있었다. 동이 트자마자 마을이장은 영정사진과 가족사진을 찍어야 하니 마을회관으로 모이라고 재촉했다. 어르신들은 양복에 포마드란 머릿기름도 발라 한껏 멋을 냈다. 한복을 입은 어머님들도 참빗으로 곱게 머리를 빗어 단정했다.

딸 부잣집인 우리 집, 어머닌 딸들에게 옷을 똑같이 만들어 입혔다. 우린 제일 아끼는 엄마표 옷을 입고 마을회관으로 수줍게 따라갔다. 유약한 동생은 어머니 치맛자락을 잡고 사진 찍는 게 무섭다고 훌쩍거렸고, 우리도 두근두근 어색하고 낯설기는 매 한가지였다. 사진 찍을 때 `펑, 펑'소리가 무서운 건 모두가 한마음인지라 이내 여기저기 아이들의 일그러진 표정들은 울음보가 터질 것 같았다.

마을회관 담벼락에 천막을 치고 사진사는 흑백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는 한 짐이나 되는 큰 카메라를 나무 삼각대 위에 설치했다. 어르신들부터 한 명씩 의자에 앉아 포즈를 취했다. 눈을 껌벅거리지 않으려 안간힘도 써보고 밝은 인상을 만들려 억지로 웃어도 본다.

익숙지 않은 사진찍기에 수줍은 마을 사람들 모두 똑같이 경직된 자세와 표정, 작위적인 모습은 로봇과 다름없었다. 커다란 사진기를 검은 천으로 가려놓고 천 속으로 들어간 사진사, 고무줄에 달린 작은 공 같은걸 움켜잡았다 놓으며 `펑'하고 사진을 찍었다. 사진사는 노트만 한 상자를 연신 바꾸며 천 속으로 들락날락 사진을 찍느라 진땀을 뺐다.

그때 마을 사람은 가족사진이란 걸 찍었다. 끝까지 안 찍겠다고 고집 부리던 울상인 동생, 뻣뻣하게 차렷하고 있는 남동생, 6남매의 빛바래고 구겨진 가족사진은 종이 앨범에 고이 간직되어 있었다.

요즘은 집집마다 카메라 한두 대쯤 있고, 손쉽게 사진을 찍을 수 있으니 가족사진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 사진이 온라인으로 전송되어 저장되고 또 금방 삭제하고 보정을 하다 보니 일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때 한 장뿐인 귀한 흑백가족사진은 안방 중앙에 가훈처럼 걸어놓았었다.

이젠 친정 안방엔 가족사진이 없다. 고인이 되신 어머니, 큰아들 자리가 비워진 사진을 걸어놓을 수가 없단다. 그 자리엔 장미꽃처럼 화사한 딸들 결혼사진이 걸려 있다. 꽃무늬 원피스에 가지런히 손을 모은 유년시절 어설픈 미소의 은은한 향기를 품은 빛바랜 가족사진은 앨범 속에 있을 뿐이다. 문명이 발전하면서 앨범도 필름카메라의 흑백사진도 귀해졌다.

명절에 만난 식구들이 서로 기념하고자 스마트폰으로 촬영하고 또 서로에게 전송하고 늘렸다 줄였다 하면서 사진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생동감 있는 연속촬영, 배경을 흐릿하게 만든 그라데이션으로 분위기 있는 사진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사진이라기보다 작품이다. 빛이 사물에 닿아 다시 토해낸 반영을 담은 매체, 다양한 촬영기법의 작품이기에 누군가는 사진은 빛으로 그린 그림이라 했나 보다.

감성과 스토리를 담은 기록사진, 때문에 묵은 사진첩엔 간간이 애증과 연민이 교차한다. 고속으로 발전하면서 손바닥 안에서 변하는 시대, 옛것에 머물러 있을 순 없지만, 이순이 목전인 나, 흑백사진처럼 흐릿해진 기억을 더듬게 하는 오늘. 종이컵에 얼룩진 커피자국처럼 고독해진다. 아리다. 옛 시간을 잡고 싶은 심정을 어디서 달래야 할까나. 비워진 공간에서 또 그리움을 한 줌 잡아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