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彷徨) 인생
김귀룡 명예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방황을 빼고 내 삶을 말할 수 없다. 청소년 시절 가출도 했고, 고3 때는 공부를 내팽개치고 당구에 빠져 지냈고, 졸업 후 영구 가출을 해서 집에 안 들어갔다. 고생해서 장교 생활을 시작했지만 체질에 맞지 않아 뛰쳐나왔고, 늦깎이로 대학에 들어가 학문의 길로 접어들었다. 철학적 방황 끝에 길을 찾아보겠다고 출가를 결심했지만 예기치 않은 우여곡절만 겪었다. 교수가 되어선 학내 정치를 한답시고 선생 노릇도 제대로 못했다.
인생에 밖으로 드러난 방황은 내적인 방황에 비하면 혼란의 정도가 훨씬 약하다. 철학을 시작하면서 겪은 혼란이 훨씬 심하다. 대학 시절 그 편한 군 생활을 때려치우고 왜 철학과에 들어와 이렇게 개고생을 하는 건지 알 수 없다고 땅을 치고 후회한 적이 있다. 정신적 방황은 그만큼 견디기 어렵다.
정신적 방황의 첫 단계는 의심이다. 의심은 지극히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던 것들에 대해 질문을 던지면서 시작된다. 과연 그럴까? 아닐 가능성은 없을까? 해는 항상 동쪽에서 뜬다고? 해가 서쪽에서 뜰 수는 없을까? 서쪽에서 뜬다고 하면 모순이 될까? 모순되지 않는다. 해가 서쪽에서 뜰 가능성이 있다는 말이다. 내가 지금 자면 내일 아침 나로서 눈을 뜰 수 있을까? 누군가가 내 기억을 다른 사람에게 이식해서 이 자리에 갖다 놓을 가능성이 없을까? 희박하지만 가능성은 있다. 그러면 내일 아침 눈을 뜬 내가 지금 잔 내가 아닐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이런 의심을 하는 사람들은 정신병자다. 철학사에 이런 정신병자들이 있었고 그 의심병이 나에게 전염되었다. 의심병은 나의 확신을 파괴하고 어디에도 마음 붙이고 살기 어려운 상태를 만들어 놓는다. 정신적 혼란의 시작이다.
다음 단계는 처음 단계에 비하면 새발의 피다. 자아의 괴멸 상태가 되면 죽는 것보다 사는 게 훨씬 어려워진다. 아침에 눈을 뜨면 천장이 보인다. 우리는 의식 없이 지나치고 일어나 바로 다음 행동으로 옮겨간다. 눈앞의 천장? 너무나 당연해서 그냥 넘어간다. 자아가 붕괴 되면 천장이 낯설어진다. 우리는 몇십 년 동안 나로서 살아왔다. 곧 나를 전제해서 모든 낯선 것들을 익숙하게 만들어가면서 살아왔다. 나는 다른 것들을 해석하는 기본 장치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붕괴된다는 건 상황에 대한 해석 장치가 고장이 난다는 걸 의미한다. 방에서 나오는데 집사람이 `일어났어?'라고 물을 때, `저 사람이 누구지?'라고 생각할 정도가 되면 일상적인 삶을 영위할 수 있을까? 어렵다. 그래서 집사람은 가끔 날 미친놈 취급한다. 자아가 무너지면 내적인 일관성이 없어진다. 이중인격이 된다고? 이중인격은 축복이다. 예측 가능하니까. 입체적 다중인격체가 된다고나 할까? 두 개의 나가 아니라 너무 많은 내가 존재한다.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힘들어진다.
자아 붕괴에는 외적인 요인과 내적인 요인이 있다. 외적인 경우는 고문을 통해 인격을 붕괴시키는 것과 같은 경우이고 내적인 경우는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지 모르는 정체를 알 수 없는 느낌에서 비롯된다. 전자는 겪은 적이 없고, 나처럼 내적으로 붕괴를 겪을 때는 속수무책으로 지켜보고 있는 수밖에 없다. 나를 붕괴시키는 상황이기 때문에 나의 통제범위를 벗어나 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이런 상황이 되면 자괴감(自愧感)이 이루 말할 수 없다. 불안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고 견디기 힘들어 당연히 길을 찾아보게 된다. 이런 문제로부터 도망쳐 외적인 일을 하는 것도 방법일 것이고 이 문제에 천착해서 밑뿌리를 파보는 것도 방법이다. 나이가 들어 어디서도 일에 안 붙여주니까 이 문제의 밑 뿌리를 들여다보는 일을 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 밑 뿌리를 캐는 일이 또한 길이 보이지 않는 암중모색의 길, 곧 또 다른 방황의 길이다. 이래저래 내 삶은 방황 인생이다.
/충북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