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민특위와 학교폭력
수요단상
`일제강점기 친일파의 반민족행위를 조사하고 처벌하기 위해 1948년 10월 22일 설치되어 활동에 들어갔던 반민특위는 불과 1년도 안된 1949년 6월 6일 친일파에 의해 장악된 당시 경찰의 습격으로 그해 9월 22일 막을 내리고 만다. 철저한 역사적 반성과 진실의 규명, 그리고 단죄로 이어지는 적폐청산의 길은 그렇게 끊어지고 말았다.'
이 문장은 2017년 6월 6일자 수요단상에 적시된 글이다.
역사적 사실을 기술한 이 글을 5년이 훌쩍 지난 지금 또다시 인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은 비극이다. 지금의 나는 `적폐'라는 그때의 단어를 후회한다. `오랫동안 쌓여 온 폐단'의 뜻을 지닌 `적폐'가 본래의 뜻을 벗어나 `당동벌이'로 전락하는 한국의 정치 현실을 숙고하지 못했다. 반민특위의 와해는 단지 `적폐청산의 길'이 끊어진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의 모든 거짓과 모순, 모든 불평등과 불공정, 온갖 부정과 차별, 급기야 나라의 존재가치마저 흔들리게 하는 파멸의 시초였음을 통렬하게 절감하고 있다.
`반민특위와 학교폭력이 무슨 상관이 있는가' 라고 의심하는 눈초리를 거두라. 권력을 가진 가해자가 득세하고 피해자는 속수무책인 사회가 될 것임을 일찌감치 예견된 일이다.
검찰출입기자 시절 어느 부장검사와 나눈 대화는 30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음에도 사무치게 생생하다. 학교폭력에 대한 조심스러운 우려가 나타나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당시에는 `왕따'라는 표현도 만들어지지 않았고, 일본에서 난무하던 `이지메(いじめ)'로 겨우 대신하던 시기였다. 경제사정이 나아지면서 극성의 교육열의 고개를 들기 시작했으며, 자식을 위해 `촌지'라는 부정이 횡행하던 때였다. 어른들 사이의 부정에 따른 편애가 학생들의 질서를 무너뜨렸으며, 학교폭력은 이 질곡에서 비롯된다. 법질서 차원에서 검찰의 강력하고 정의로운 수사가 필요하다는 기자의 의견이 단박에 무시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검찰간부는 전교 부회장인 중학교 2학년 딸을 자랑하면서 “학생 대표로 선출되고, 그 자리를 유지하면서 3학년이 되면 학생회장이 되기 위해 별도로 2천만원이 든다.”며 가진 자의 특권을 당당하게,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내뱉었다.
그 검찰간부와 그의 어린 딸의 인생은 실패하지 않았을 것이고, 그런 특별한 면죄와 면책의 울타리에서 대한민국의 특권 지배계급으로 특별하게 살고 있을 것이다. 다만 그때 가진 것 없이 그저 죽어라 공부만하다가 교사들로부터 까닭모를 푸대접에 신음하며 맨 주먹으로 모순을 깨부수려했던 방정한 품행의 소년들이 그 계급에 오르지 못했음은 지극히 선명하다.
반민특위는 일본제국주의의 침탈에 대한 분노와 응징에 해당하지 못한다. 나라와 백성을 배신하여 국권을 내어주고, 그것도 모자라 일본의 앞잡이가 되어 온갖 만행과 밀고, 체포와 고문의 악행을 저지른 반역자를 색출하여 죄과를 가리고 나라를 바로 세우자는 것이 본질이다.
속담에 `때리는 시어미 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는 말이 있다.
비슷한 처지임에도 일제에 빌붙어 감시하고 밀고하는 간접적 배신과, 얄팍한 권한에 기생하여 체포와 수탈, 그리고 끔찍한 고문을 자행했던 적극적 반역의 행위를 색출하고 처단함으로써 스스로의 내재적 모순을 떨쳐버리자는 결연한 의지가 반민특위의 `법'에 담겨있다.
반민특위는 친일 세력과 이승만에 의해 와해되었고, 우리는 수없이 많은 피로 강산을 적시는 독립의 의지와 핍박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친일파에게도 죄를 묻지 못했다.
대한민국의 검찰과 경찰은 `친일'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다. 일제의 수탈과 강점을 앞장서서 도와주었던 배반의 `법 기술'은 삐뚤어진 권력이 되었고, 여태 우리는 반역에 대한 반성과 자책이 실종된 상태에서 나라를 유지하고 있다.
더 기가 막히는 것은 `때린 시어미'는 여전히 도발의 발톱을 숨기지 않고 있으며, 호시탐탐 만행을 저지르고 있음에도 종주먹만 흔들 수밖에 없다는 것. 근본 없는 세상에 적은 언제나 내부에 있다. 그리고 내부의 적이 저지른 만행을 돌이키기에는 고통이 너무 심각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