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말 의병 대부 독립운동의 초석 의암 유인석 선생

충북 역사기행

2023-05-29     김명철 제천교육장
김명철

 

“의로써 죽는 것이 사는 것보다 영광스러울 때가 있다. 오늘 이 지경에는 오로지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이 말은 한말 최초의 의병장이며, 의병의 대부였던 유인석 선생이 죽음을 각오하며 했던 말이다.

`의병'이란 문자 그대로 나라와 겨레를 위한 정의의 군대였다. 충북 제천은 한말 의병항쟁이 처음 시작되었고 전투가 가장 치열했던 곳이다.

그 중심에는 유인석(1842~1915)이 있다. 1896년 2월, 유인석은 호좌창의진(湖左倡義陣)을 결성했다. 그리고 격문을 발송하여 전국에 의병이 일어나도록 했다.

의병들을 이끌고 충주성을 점령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으나 무기 열세, 군수품 부족, 관군과 일본군의 진압으로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러다 제천 남산 전투 패배 후 의병활동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한말 의병들의 첫 봉기였으며 첫 좌절이었다.

유인석은 새로운 돌파구로써 중국 망명을 택했다. 중국에 본거지를 건설하여 의병활동의 재기를 도모하였다. 한말 의병부대가 처음으로 뿌리를 내린 서간도 고려구였다. 그러나 중국 관원들이 일본과 이미 화약을 맺었다는 명분으로 의병의 해산과 귀국을 촉구했다. 유인석은 200여명의 의병을 해산하고 한인이 1만여명 거주하고 있는 통화현 오도구로 거처를 옮겼다. 유인석은 이곳에 망국단을 만들어 매달 1일에 참배하며 치욕을 씻을 날을 기다렸다. 그러면서도 만주지역의 한인들을 규합하고 국내의 동지들에게 서간도로 이주할 것을 호소했다.

각고의 노력으로 유인석은 드디어 1910년 6월 러시아에서 최재형, 이범윤, 안창호, 이상설 등과 함께 `13도의군(十三道義軍)'을 창설했다. 그리고 고종에게 러시아 망명을 권유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일제의 압력에 의한 러시아 당국의 탄압으로 모든 것이 실패하고 말았다.

유인석은 러시아 유정구 운현 등지의 산속에 은거하며 지구전을 모색했다. 1913년에 늙은 몸을 이끌고 중·러 국경 부근에 위치한 목화촌으로부터 고려구를 거쳐 평정산진에서 의병활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유인석 선생은 1915년 3월 천고의 한을 품은 채 생을 마쳤다. 그때 나이 74세였다. 만주지역에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는 구상은 신민회의 독립운동 방략과 맥을 같이하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3·1운동 이후 대한광복단, 광복단, 의군부 등 독립운동단체가 결성되어 다양한 무장투쟁을 전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2003년에 의암기념사업회와 요녕성 평정산진 정부가 `의암기념원'을 조성했다. 기념비는 유인석의 삶과 활동을 상징하고 있다. 기단 직경은 7.4m로 서거 당시 나이를, 비신의 높이는 1915cm로 서거 연대를, 비신의 너비는 1842cm로 출생 연대를, 지구본의 직경은 1.27m로 출생월일을 상징한다. 유인석의 유해는 춘천으로 모셔와 강원기념물 74호로 지정되어 있다.

올바른 교육이란 인간과 역사에 대한 통찰과 믿음의 기초 위에 이루어지는 것이라 생각한다.

충북 제천은 의병정신을 계승할 목적으로 1995년부터 제천의병제를 거행하고 있다. 자양영당 고유제, 의병 횃불 봉송, 의병 제전, 의병 유적지 순례, 학술행사 등이 이루어진다.

제천교육지원청에서도 의병장 유인석을 비롯해 한말 의병들의 정신을 어떻게 선양할 것인지 구체적인 교육활동을 추진하고 있다. 제천시와 협의해 국내 탐방을 기반으로 멀리 만주와 연해주, 중국에 이르는 국외 탐방까지 계획하고 있다. 제천의 모든 아이들이 의병정신을 계승하고 21세기 시대정신을 구현하며 나라와 민족, 인류의 평화에 쓰임 받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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