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꽃을 소환한다
시간의 문앞에서
옛날 시골집 장독대 주변이나 마당 한 귀퉁이에는 봉숭아. 채송화, 족두리 꽃(풍접초), 과꽃이 여름을 환하게 밝혀주었다.
꽃밭을 따로 만들어 키 순서대로 꽃을 심어 멋을 낸 집도 간혹 있었으나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거의 쓸모가 적은 담벼락 아래나 장독대 주변에 꽃을 심었다.
우리 집도 별반 다르지 않아 내가 기억하는 꽃밭은 장독대 주변과 마당 가장자리, 담벼락 아래였다.
꽃차를 배우며 신기하고 좋았던 것은 어릴 때 우리 집 마당에서 보던 꽃들이 꽃차의 재료로 쓰임이 있다는 사실이다.
그중 하나가 작은 나팔 모양을 닮은 소박한 분꽃이다.
한 가지에서 여러 가지 색깔이 어우러져 피어나는 모습이 마치 꽃이 변신 마술을 부리는 것처럼 신기했다.
멘델의 유전법칙을 배우며 분꽃이 불완전 우성이고, 중간유전을 해서 그렇게 여러 가지 색이 섞여 피어난다는 설명에도, 유전법칙을 거스르는 그런 분꽃이 더 신기했다.
지금도 분꽃을 보면 여전히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처럼 꽃의 마술을 바라보느라 시간 가는 줄 모르기도 한다.
서양에서는 분꽃을 `four o'clock flower'라고 부른다. 4시에 피는 꽃이라니 꽃의 생태를 기가 막히게 표현한 이름이다.
분꽃은 해거름이 깔리기 시작하면 피었다가 해가 뜨는 아침이면 꽃잎을 오므린다. 그래서 시계가 귀하던 시절에는 분꽃이 피기 시작하면 어머니들은 저녁밥을 준비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쉬어家를 마련하고 꽃밭을 만들었을 때 어린 시절 우리 집 마당에 피어 있던 꽃들을 나의 꽃밭에서도 보고 싶었다.
봉숭아, 과꽃, 백일홍 채송화 씨앗을 구해서 뿌리고 분꽃은 아파트 화단에 경비아저씨들이 파종한 모종을 얻었다 심었다.
그런데 분꽃은 잘 자라지 못하고 사그라져 꽃을 보지 못해 다음 해를 기약해야 했다.
다관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우러난 꽃분홍 찻물이 새색시처럼 참 곱다.
분꽃으로 차를 우리면 꽃은 피어나지 않는다. 대신 고운 빛과 은은한 향기로 눈과 마음을 사로잡는다. 워낙 우러난 탕 색이 아름다워 다른 음료랑 블렌딩을 해도 손색이 없는 차다.
나는 사이다와 블렌딩을 한 다음 얼음을 동동 띄워 마시는 걸 좋아한다. 사이다의 톡 쏘는 맛과 시원하고 은은한 향이 입안에 감돌면 그 어떤 음료도 부럽지 않다. 레몬즙을 넣어 얼음을 띄워 시원하게 마셔도 청량하다. 그러고 보면 분꽃 차는 여름에 참 잘 어울리는 꽃차다.
분꽃의 한약명은 `자말리'라고 부르며 한약재로 쓰이기도 한다. 화장품이 귀하던 시절에는 까만 씨앗 속의 하얀 배젖을 갈아 분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어쩌면 분꽃이란 이름 안에는 우리네 어머니가, 정겨운 고향 마당이 스며들어 있어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따스해지는 것 일 게다.
이름도, 소박한 생김새도, 정겹기만 한 분꽃을 차로 덖어 우리면 그 가치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고운 모습으로 확인시켜 준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분꽃 차의 가치를 인정한다. 약성이나 효능을 굳이 설명하듯 구구절절 풀어놓고 싶지 않은 차가 분꽃 차이기도 하다.
다만 모든 꽃차를 마실 때 꽃 알레르기가 있거나 아기를 품은 임산부들에게는 조심하라고 권한다.
나 역시도 몸에서, 입에서, 거부하는 차가 있을 때가 있다. 그러면 마시지 않는다.
즐기자고, 건강해지려고 마시는 차가 몸에 해로우면 좋은 꽃차인들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나에게 분꽃은 추억이 가득 담긴 꽃이며 오늘도 차를 마시며 언제나 정겨운 고향마당을 소환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