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사랑
시론
누군가를 진정으로 위해주는 참된 사랑을 불교에서는 자비라고 표현한다. 막연하게 자비가 이런저런 것이라고 피상적으로 아는 것만으로는, 자신의 이득과 무관하거나 자신의 만족을 충족하지 못할 경우, 선뜻 참된 사랑과 참된 자비를 실천하는 일은 쉽지 않다. 따라서 참된 자비가 무엇인가를 정확하게 알아야만, 세상을 밝히고 맑히는 참된 자비를 제대로 실천하는데 한걸음 가까이 갈 수 있음은 너무나 당연하다. 불교의 핵심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여러 경전 중에서도, 자비에 대한 명료하면서도 직접적인 가르침을 전하고 있는 경전은 열반경이다. 열반경은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듯 상대를 포용하고 보살피는 섭수 자비와 함께, 아버지가 잘못을 저지른 아이를 꾸짖어 올바른 사람이 되도록 하는 절복 자비를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가르침을 통해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좋은 게 좋다고 누군가를 무조건 이해하고, 도와주면서 따듯하게 대하는 것이 참된 사랑도 아니고 참된 자비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자녀를 교육하는 일에서도 그렇고, 타인과의 인간관계에서도 그렇고, 칭찬 일변도이거나 비판하는 쪽으로 치우쳐 있다면 올바른 자녀 교육은 물론이고 참된 인간관계 형성이 어려울 것은 너무나 분명하다. 주변 인연들을 위한 자비를 실천한다는 명목 아래, 언제나 따듯한 마음으로 상대를 포용하고 보살피는 섭수 자비에 치우치면 안 된다는 것이 열반경의 가르침이다. 이 같은 맥락에서 승만경도 “절복 할 자는 절복하고, 섭수 할 자는 섭수”해야 한다고 역설하고 있다. “절복 할 자는 절복하고, 섭수 할 자는 섭수”한다는 것은 바로, 당근을 줘야 할 때는 당근을 주고, 채찍을 휘둘러야 할 때는 채찍을 휘둘러야 한다는 의미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참사랑도 빛과 소금의 역할로 압축-요약할 수 있는데, 따듯한 마음으로 이해하고 포용하며 도와주면서 올바름으로 이끄는 빛의 역할과 함께 더는 부패하지 않도록 지적-비판하며 따끔하게 소금을 뿌리는 역할도 병행할 때 참사랑이 완성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무조건 자녀를 칭찬하거나, 무조건 자녀를 지적하고 꾸짖는 일 없이, 섭수 자비와 절복 자비를 자유자재로 베풀면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는 것을 주역은 “음양화평(陰陽和平) 중정무구(中正無垢)”란 짦은 구절로 강조한다. 음양화평은 나아가야 할 때 나아가고, 물러서야 할 때 물러섬으로써 음양이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며, 중정무구는 음과 양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 없이 음양이 조화로운 올바를 중도를 걸어감에 따라 허물이 없다는 의미다.
인생이란 길고 긴 여행길에서는 무조건 습관적으로 브레이크를 밟으며 소극적으로 움츠리는 일은 없어야 한다. 반대로 무조건 습관적으로 액셀을 밟으며 과속-질주하는 무모함을 과감하고 용기 있는 삶이라고 착각하는 일도 없어야 한다. 누군가를 사랑하며 자비를 베푸는 일에서도 음양이 조화를 이루어야 함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때그때 처한 상황에 따라, 어머니처럼 따듯하게 포용하며 빛의 역할을 하는 섭수 자비와 함께 엄한 아버지처럼 단호하게 지적하고 꾸짖으며 소금의 역할을 하는 절복 자비를 자유롭게 선용할 줄 알아야만 참된 보살이고, 참된 보살 도를 실천하는 것이란 사실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0점 조정된 저울이 원근 친소와 무관하게 정확하게 무게를 재듯, 지공 무사한 마음으로 그 어느 쪽으로도 치우침 없이, 나아갈 때 나아가고, 멈출 때 멈추고, 물러설 때 물러서면서 물 흐르듯 흘러가는 음양화평의 멋지고 아름다운 삶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