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누구의 시대
화요논객
“미국에는 대통령 할 사람들이 도대체 저 사람들밖에 없나?”
내가 가끔 하는 소리지만, 나 말고도 이런 얘기를 하는 사람들을 종종 만나게 된다.
여기서 `저 사람들'은 민주당 후보였던 조 바이든 현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공화당 대통령 후보다.
바이든의 고령이나 트럼프의 돌발행동만 놓고 하는 얘기가 아니라 `한 번이면 됐지 뭘 또'라는 생각도 들어서다.
이런 얘기에 맞장구를 치는 사람도 있지만 “한국 정치도 지겨운데 뭐 미국 정치에까지 관심을 두느냐”라며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다.
그런데 한국 정치는 어느 정도 미국 정치의 영향을 받고 있다. 전시작전권도 갖지 못한 한국의 안보는 한미동맹의 `종속변수'다.
윤석열 정부 들어서는 북한과 러시아를 꼬박꼬박 `러북'이라고 부르고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러시아랑 친해진 것도 아니다.
우리의 삶의 질은 정치가 결정한다. 그래서 `정치 혐오'는 스스로 발등을 찍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치인들은 `혐오 정치'를 이용해 편을 가르고 세력을 형성하며 적과 함께 공존한다. 그런 점에서 거대 여야는 한 몸이다.
결국 최악을 막기 위해 차악(次惡)이나 차선(次善)을 선택하는 유권자는 불행하다. 그 결과가 박빙이라면 더 그렇다.
지난 대통령선거에서 불과 0.73%p 차로 석패(惜敗)한 이재명 전 민주당 대표가 불과 한 달 뒤 계양을 국회의원 보선에 나가고 당 대표까지 되는 순간 `당분간 대선은 끝나지 않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은 극도의 정치 피로감에 찌들고, 대통령의 국정 지지도는 웬만해선 30% 밑으로 떨어지지 않으리라는 예측도 섰다.
윤 대통령이 어떤 수준의 정치를 하든 그래도 내가 윤(尹)을 찍어서 이(李)의 당선을 막았다고 스스로 위로하는 무리가 나올 터였다.
예측대로 대통령이 야당 대표를 인정하지 않으며 협치는 실종됐고, 2년 뒤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했음에도 `제왕적 대통령'이라는 권력과 절대다수의 의회 권력은 여전히 `강 대 강' 대치 중이다.
지금부터는 미국 얘기다. 이런 점에서는 `미국 정치가 한국 정치를 따라 하는가?' 싶을 정도다.
`바이든이 싫거나 트럼프가 싫어서' 투표장으로 나오겠다는 유권자들이 떠밀리듯 결집하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인데 혹여라도 바이든이 재선 도전을 포기하는 순간, 트럼프의 벽도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든이 사라지면 팽팽하던 긴장의 끈이 툭 끊어지고 트럼프는 정치적으로 `엉덩방아'를 찧게 될 수도 있다는 가설이었다.
물론 얼른 다시 일어나 전열을 정비할 수도 있겠지만 그 엉덩방아로 엉덩이뼈가 부러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사 해리스가 정치적으로 미숙하고, 민주당 주자가 또 다른 인물이 되더라도 새로운 시대의 선택은 트럼프가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다.
7월 21일, 바이든 대통령이 재선 도전을 포기했다.
큰 혼란에 빠질 거라는 예상과 달리 미국의 떠났던 민주당 지지자들과 중도까지 해리스에게로 모이고 있다.
여러 여론조사 결과가 이변이 있을 수 있음을 예고하고 있다.
다시 우리나라 얘기다.
대통령의 신분을 망각한 노골적 정치개입, 주변 세력의 국정농단, 중대사를 번번이 매듭짓지 않는 무능함 등 야당과 야당 지지층은 대통령 탄핵을 주장하지만 들불은커녕 촛불도 불붙지 않고 있다.
오히려 권력은 안에서부터 금이 가고 있다. 검찰 시절부터 호형호제하던 한동훈 신임 당 대표는 뜻밖에도 `항윤(抗尹)'의 아이콘으로 홀로 서고 있다.
새로운 시대정신을 만들지 못하면 숙명적으로 흘러갈 시대와 함께 `누구누구의 시대'가 되어 함께 흘러갈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