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격
데스크의 주장
이회영 선생은 독립운동가이자, 교육자, 사상가이며 조선말 10대 부자 안에 들던 집안의 6형제중 넷째이다.
1910년 8월 국권이 강탈당하는 경술국치를 당하자 이 해 12월 30일 이회영 6형제와 가족, 해방시킨 노비까지 약 60명이 압록강을 향해 한양을 떠나기까지 전 재산을 급하게 처분하여 만주로 이주했다. 이때 마련한 자금은 당시 돈으로 약 40만원, 현시가 600억원으로 추산된다.
이렇게 준비한 거금으로 이들 6형제가 설립한 것이 항일무장투쟁의 토대가 된 신흥무관학교다.
청산리전투와 봉오동 전투에서 활약한 김좌진, 홍범도 장군도 이곳을 거쳐갔다.
그와 그의 6형제는 모두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그 중 5명이 옥사하거나 아사했다.
첫째 이건영은 선산을 돌보기 위해 조국으로 돌아와 일제 감시속에 살다 1940년 병으로 숨졌다. 둘째 이석영은 두 아들을 먼저 보낸 뒤 1934년 상해에서 74세의 나이로 굶어 죽었다. 셋째 이철영은 1925년 병사했고 넷째 이회영은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다가 만주의 뤼순 감옥에서 순국했다. 막내 이호영은 소식이 끊겼다가 일가족과 함께 일본군에게 몰살당했다.
다섯째 이시영만이 살아 남아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을 지냈다.
한편 이완용(李完用, 1858년~1926년)은 을사늑약, 기유각서, 정미 7조약, 한일 병합 조약을 체결하여 을사오적을 포함한 주요 친일파, 매국노로 평가된다. 1910년 8월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일본의 각본대로 내각회의를 소집해 한일병합에 관한 건을 상정하고 어전회의에 올려 황제의 면전에서 합병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한일양국병합전권위원회가 설치되자 22일에는 스스로 전권위원에 올라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의 관사에서 한일 병합 조약에 직접 서명했다.
조약체결 후 곧 관직을 사퇴한 이완용은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백작(伯爵)의 작위와 잔무처리수당 60여원(당시 일본돈 2원은 조선엽전 1천닢과 같은 가치였다고 한다), 퇴직금 1458원 33전, 조선총독부의 은사공채금 15만원을 지급받았다.
한일병합 이후 백작이 된 그는 1912년에 조선총독부 중추원 부의장에 올라 `일선융화'(日鮮融化)를 진행시켰다. 그는 정기적으로 일본천황에게 조선귀족 대표로 직접 문안인사를 갔으며 신사 참배는 물론 조선인 귀족들을 모아 두고 `천황폐하 만세'를 불렀다.
친일인명사전에서 확인된 바로는 이완용의 재산은 당시 돈 300만원, 지금 돈으로 환산하면 600억원 가량 된다고 알려져 있다. 이완용은 해방 직전에 땅들을 다 팔아서 현금화했다고 한다. 당시 이완용이 소유한 땅은 여의도의 8배 면적이었다.
전 재산을 처분해 마련한 독립운동자금 600억원과 매국의 대가로 마련한 600억원.
애국지사와 매국노, 그리고 그 후손들의 삶을 살펴보며 마음이 무거운데 친일 역사관 물의를 빚고 있는 김형석 대한민국역사와미래 이사장이 독립기념관장에 새로 임명되며 논란이 확산하고 있다.
우당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 광복회장은 “독립기념관장 후보자로 독립운동을 폄훼하고 일제 식민 지배를 미화하는 인사들을 추천하는 것은 헌법정신과 역사적 정의에 반하며 선임 과정에서 독립 정신이 훼손되고 우리의 정체성이 유린당한 것”이라며 강력 반발하고 있다.
이에 앞서 한국학중앙연구원장, 국가교육위원회 위원장,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위원장 등 주요 학술·보훈기관에 뉴라이트 계열 인사들이 잇따라 중용되면서 현 정부의 친일적 역사인식에 대한 우려가 깊어지고 있다.
2024년 8월, 가슴 속에서 한여름 폭염보다 뜨거운 것이 올라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