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야에서
화요논객
연해주에서 이 글을 쓴다.
조선 후기인 1860년대부터 땅이 없는 농부들이 두만강을 건너 만주로 갔다. 2024년은 한인이 러시아 땅인 연해주로 건너간 지 160주년이 되는 해다.
이를 기념하는 행사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와 우수리스크 일원에서 열리고 있다. 그 참관단의 일원으로 9월 19일~24일까지 현지 체류 중이다.
문헌에 남아있는 첫 이주는 1863년 연해주 `지신허'에 정착한 열세 가구다.
한인 이주가 본격화된 시기는 일제강점기다. 농업이민과 강제 동원뿐만 아니라 항일 독립투쟁을 위해서 수많은 우국지사가 간도와 연해주로 갔다.
충북에서도 신채호, 정순만, 이상설 선생 등이 연해주를 무대로 독립운동을 펼쳤다.
청주 옥산 출신의 정순만 선생과 진천 출신의 이상설 선생은 그곳에서 돌아오지 못한 고혼이 됐다. 이상설 선생은 화장해 유해를 뿌린 수이푼강 인근에 유허비가 남아있을 뿐이다.
연해주는 그렇게 우리의 제2 영토였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윤석열 정부의 외교적 거리두기로 2019년 하루 열세 편에 달하던 블라디보스토크행 하늘길이 끊겼다.
그래서 이번에 중국 옌지까지 비행기를 타고, 육로로 훈춘을 거쳐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꼬박 하루를 걸려 왔다.
가는 동안에 지금은 크라스키노로 이름이 바뀐 `얀치에'도 거쳐 갔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연추'라고 불렀던 이곳은 안중근 의사가 열한 명의 동지들과 단지동맹을 맺고 무명지를 잘라 맹세했던 그곳이다.
가는 길에 <광야에서>나 <기차는 그 새벽을 떠났다> 같은 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으나 소리 내 부르지는 못했다. 울먹울먹 목이 메는 길이라서다.
그런데 광활한 만주벌판 대부분은 아직도 황무지다. 도로 옆 상당수 너비의 땅은 아예 경작하지 못하게 묶어 놓았다. 세계에서 가장 땅이 넓은 나라의 위용이다.
오죽하면 극동(동아시아 지역)으로 이주하는 사람에게 주민 1인당 토지 1헥타르를 무상으로 주는 정책까지 펼치겠는가.
이 면적이 러시아 전체 면적의 3분의 1이나 된다고 한다. 러시아 국적을 가진 고려인들은 물론이고, 한국인들에게도 토지 제공은 우호적이다.
우리에겐 슬픈 역사지만 연해주는 물론이고 멀리 중앙아시아까지 고려인들은 척박한 황무지를 개간해 문전옥답으로 만들었다.
1937년 스탈린의 강제 이주 정책으로 중앙아시아로 실려 간 고려인들의 초기 정착지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는 벼 이삭이 도시의 상징이 됐을 정도다.
연해주가 다시 우리의 식량 영토가 되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면서 지구촌 식량 위기를 계기로, 우리나라는 해외농업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이 가운데 60%에 가까운 17만 헥타르가 러시아 연해주에 집중돼있다. `고려인들은 황무지도 옥토로 만든다'라는 `신뢰 자본' 덕분이다.
대기업뿐만 아니라 유니베라 같은 건강식품 제조기업, 대순진리회 같은 종교단체도 뛰어들었다. 규모는 크지 않지만, 사회적협동조합 `바리의 꿈'도 생산농장과 가공시설을 갖추고 장류, 압착 콩기름, 두부 등을 만들고 있다.
연해주는 땅도 기름지지만, 유전자 조작 GMO 농산물을 완벽하게 배제하는 지역이다.
그래서 강원도는 학교급식에 바리의 꿈이 생산하는 연해주산 기름과 장류만을 사용한다. 이와 관련한 사업비는 연간 15억 원 정도면 충분하다.
분단된 대한민국은 대륙으로 가는 길이 막힌 섬이다. 특히 충북은 육지에 둘러싸인 바다 없는 `고도(孤島)'다. 하지만 지정학적 한계를 뛰어넘어 대륙의 꿈을 꾸지 말란 법은 없다.
연해주는 16만4700㎢, 한반도 전체 면적의 75%에 이른다. 그래 봤자 러시아 면적의 0.97%다. “우리 어찌 가난하리오. 우리 어찌 주저하리오” 우리가 부를 노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