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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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인영 사진가
  • 승인 2018.11.27 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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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가를 말하다
정인영 사진가
정인영 사진가
 

포토저널리스트겸 사진평론가인 이명동. 경북 성주에서 태어나 성주공립보통학교 4학년 때 아버지가 송아지 사려고 할머니에게 맡긴 15원 중 12원을 몰래 꺼내 일제 카메라를 구입, 사진에 입문했다. 일본 도쿄중앙학원과 일본법정대부속 상업학교를 졸업한 그는 광복 후 대한사진예술연합회에서 박필호, 이해선, 현일영, 이태웅 사진가에게 매월 자신이 찍은 사진 15~20매의 사진평을 받으면서 아마추어의 실력을 키웠다.

외국 사진기자들이 6.25 한국전쟁 사진을 찍으면서 사진 저널리즘이 싹트기 시작한 때인 1953년 부산 중앙일보(지금의 중앙일보가 아님)사진부장으로 3년 근무한 그는 1955년 동아일보 사진기자로 입사하면서 본격적인 보도사진촬영을 한다. 당시 부패한 이승만 자유당정권이 시작과 몰락할 때까지의 수많은 사건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중에서도 최루탄이 눈에 박힌 김주열과 3.15 부정선거에서의 표 도둑 현장을 찍은 그의 사진은 이 땅의 역사적 진실로 남아 있다.

사진으로 정의를 바로 세우기 위해 그는 경찰의 총알이 난무하는 4.19 학생의거현장은 물론 경무대 앞에서의 피가 낭자한 치열한 장면들을 빼놓지 않고 필름에 담는 저력을 과시했다. 1940~50~60년까지 우리나라 신문들이 1면과 사회면에 혼란기의 생생한 사진들을 대서특필함으로써 보도사진의 중요성이 국민에게 제대로 인식되는 중심에 그가 있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러한 취재근성으로 많은 테러도 당했다. 자유당 불법현장사진은 물론 장면 저격사건을 촬영했을 때는 수많은 고초를 겪었고 그가 직접 법에 고소하기도 했다. 박정희 공화당 정권이 들어서면서 여러 각도로 보도사진에 대한 규제가 많이 있었지만, 그의 기자근성이 저하되지는 않았다.

일반인이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열정을 이어온 그는 지칠 줄 모르는 도전과 확고한 목적, 진실된 사회를 바라는 의식이 뛰어난 저널리스트이자 아티스트였다. 오직 언론사 사진기자로만 살아온 그는 한 시대를 보고 느낀 그대로 증언한 사진가였다.

사진기자의 정신과 사명완수 등에까지 사진이 지닌 휴머니즘이 함축되어야 민중을 지키고 민중을 위할 수 있다는 그는 카메라의 발달이 사진의 역사이고, 사진의 역사는 곧 카메라에 의한 영사 표현의 역사라고 말했다. 글을 쓰는 기자와는 달리 행동반경이 확대되어야 하고, 숭고한 저널리즘을 한시라도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다. 이승만 자유당 독재정권과 맞서 싸우는 민중의 대변지 동아일보와 평생 인연이 된 그는 사진기자로서 지닌 정신을 남김없이 시대적 상황에 아낌없이 바쳤다. 국민의 정신적인 보루였으나, 4.19 학생봉기의 사회적 방패인 동아일보에서 그는 어떠한 위협과 방해에도 굴하지 않고 필연적 시대의 요청에 인생을 바쳤다.

정의감과 의리가 있는 그에게 지나간 세월은 늘 잊히지 않는다. 1958년 9월 19일 경북 영일 을구 재선거 현장에서의 도를 넘은 공포 가운데에서도 이루어낸 자유당 표 도둑을 찍은 것. 또 4.19 민주혁명 때 경무대 어귀에서 경찰의 실탄 발사로 수많은 젊은 학생들이 피범벅 속에 쓰러져 가는 모습을 목숨을 걸고 찍어낸 일이다. 사진기자에게 개방적인 무한정 자유가 저절로 찾아주지 않는다는 그는 그래도 제일 멋진 직업이었다고 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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