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의 핵심 문제는 역시 나(自我)다. 공부의 시작은 무아(無我)를 깨닫는 데서 시작된다. 내가 없어진다고 해서 공부가 끝나는 건 아니지만 무아(無我)의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그다음 단계로 나갈 수 없다. 탈속(脫俗)은 무아(無我)를 자각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이 말은 세속(世俗)은 자아가 있어야(有我) 성립한다는 걸 의미한다.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世俗)은`나'를 전제로 한다. 내가 없다면 책임을 물을 주체가 사라진다. 어제의 나와 오늘의 내가 다르다고 하면 어제 살인한 자를 오늘 처벌할 수 없게 된다. 죽인 자와 처벌 받을 자가 다르기 때문이다. 자기 삶에 책임을 지는 주체로서의 자기가 어제-오늘-내일의 시간 동안 연속해서 있어야 세상 삶이 성립한다.
세상 삶에서 나를 지울 수 없다면 나를 어떻게 세우고 사는 것이 좋을까? 두 가지 사례가 떠오른다. 그 하나는 토지의 작가 박경리 여사이고 다른 하나는 미스터 선샤인이라는 드라마의 한 장면이다.
박경리의 외동딸이 김지하 시인에게 시집을 갔다. 엄마와 남편 모두 센 사람들인지라 한 집에 살기 시작할 때 걱정을 했지만 딸인 자기가 보기에도 샘이 날 정도로 서로를 아끼며 치켜세우고 잘 지냈다. 그런데 자신의 작품세계에 대해서는 양보가 없었다. 둘 중에 누군가가 작품을 장모(사위)에게 보여줬는데 조금 신랄하게 비판을 했더니 사위 장모 사이에 할 수 없는 욕을 하면서 거칠게 싸우는데 워낙 센 사람들이라 옆에서 뭐라 하면 역효과가 날 것 같아서 친구 집으로 피신을 했다.
며칠 후 돌아와 어떻게 지내나 봤더니 남편이 부엌에 들어와 라면을 끓여먹고 설거지를 말끔하게 하고 나가니 이후 엄마가 내려와 밥을 해먹고 설거지하고 올라가더란다. 같은 집에 살면서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면서 살고 있었다. 이 싸움은 보통 몇 개월 가는데 자신들이 풀어져야지 옆에서 누가 뭐래도 듣지 않았다고 한다. 작가정신에 투철하다보니 사위-장모의 가족관계는 어디로 갔는지 실종돼버렸다.
드라마 미스터 선샤인에서도 유사한 사례가 등장한다. 집안에서 절대권력을 가진 할아버지와 삶의 진로에 관해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 손녀가 정면으로 맞붙었다.
손녀: 달에 한 번 기별지(신문)만 읽겠습니다. 상인(常人)도 신학문을 하여 벼슬길에 오르는데 계집이라 하여 어찌 쓰일 데가 없겠습니까?
할아버지:쓰이지 마라! 아무 곳에도 쓰이지 말라고 이러는 것이다. 기별지는 허락못한다.
손녀:싫습니다. 조선의 운명이 풍전등화와 같은데 어찌 관심을 갖지 않을 수 있습니까?
할아버지:그러니 금하는 것이다. 이 집안에서 조선의 운명에 대한 걱정은 니 애비, 큰애비로 되었다는 말이다. 단정히 있다가 혼인하여 지아비 그늘에서 꽃처럼 살란 말이다. 손녀:그럼 (그렇게 사느니) 차라리 죽겠습니다. 할아버지:그럼 죽어라. 한치의 양보도 없는 격론 끝에 손녀는 죽으려고 곡기를 끊는다.
조선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쓸모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손녀, 쓸모 있는 사람이 되지 않아야 안온한 삶을 유지할 수 있다는 할아버지, 그렇게 사느니 죽겠다는 손녀, 그러면 죽으라는 할아버지, 죽겠다고 곡기를 끊는 손녀의 싸움은 극단으로 치닫는다. 한치의 양보도 없는 목숨 건 자존심 싸움에 더 보탤 말이 있을까? 나는 없다.
박경리, 김지하, 할아버지, 손녀의 자존심 싸움에서 군더더기가 있을까? 없다. 이들의 싸움에서 지저분한 구석이 있을까? 없다. 이들의 싸움은 치열하고 간명하고 깔끔하다. 기왕에 나를 갖고 가야 할 삶이라면 지저분하기보다는 깔끔한 게 좋고, 느슨한 것보다는 치열한 게 좋고, 복잡하기보다는 간명한 게 좋다. 나를 없애는 과정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단순하고, 깔끔하며, 치열하지 않으면 내가 피어나 담쟁이덩굴처럼 번져나간다.
/충북대 철학과 명예교수
김귀룡 명예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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