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일부작 일일부식( 一日不作 一日不食)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
백장회해(百丈懷海)는 중국 당나라 때 선승(禪僧)이다. 백장산(百丈山)에서 살았기 때문에 백장이고 법명이 회해(懷海)라 백장회해다. 백장은 중국 선종(禪宗)에 큰 영향을 준 선승이다. 선종(禪宗)은 중국에서 시작된 대승불교 하나의 종파다. 선종의 가르침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내면에 본래 불성(佛性)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믿고 좌선과 참선 등의 수행방법으로 정진(精進)하면 비로소 자기 내면의 본래 불성을 발견하여 모든 번뇌를 끊고 해탈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 하는데 이것이 선종(禪宗)의 최대의 목적이자 교리의 핵심이다. 중국에서 시작된 선종은 한국과 일본에도 전파되었다. 이 계통의 여러 분파를 선종(禪宗)이라고 통칭하고 이 계통의 불교를 선불교(禪佛敎)라고 부른다. 한국불교의 최대종단인 대한불교조계종도 선종의 한 분파이다. 선종의 1대조는 그 이름도 유명한 달마대사다. 그러니 백장은 선종의 족보상으로는 달마의 제자가 된다.
불교의 사찰은 목적과 방향에 따라 경전(經典)을 배우는 교육기관인 강원(講院)과 율장(律藏)의 계율(戒律)을 전문적으로 공부하는 곳인 율원(律院) 그리고 선(禪)을 전문으로 하는 선승들이 모여 수행하는 선원(禪院)으로 구분된다. 이 세 곳에 더불어 염불원까지 모두 갖춘 도량을 총림(叢林)이라고 한다. 한마디로 총림은 승려들의 종합수행도량이다.
백장선사 당시 중국불교의 사찰은 지금의 구분으로 본다면 율원(律院) 중심이었다. 선원은 좋은 말로는 율원과 더부살이였고 쉬운 말로는 율원에 얹혀살았다. 이랬던 선사(禪寺)를 율사(律寺)로부터 독립시킨 이가 백장이다. 초조(初祖)인 달마대사 때부터 이어진 셋방살이로부터의 해방이었다. 독립의 시작은 백장선사의 청규(淸規) 제정이다. 청규란 글자 그대로 깨끗한 규칙으로 승려들이 도량에서 응당 지켜야 하는 규칙이다. 초기 선종에는 딱히 정해진 청규가 없어 율종(律宗)의 규칙을 따랐다. 그러나 율종의 그것과 선종의 의식과 방식과는 맞지 않는 것들이 많았다. 이에 백장선사는 선종만을 위한 청규인 백장청규를 제정하여 율사(律寺)에서 수행하던 선승들을 선원에서 독립적으로 수행할 수 있게 하였다. 부처님 재세 시부터 출가 수행자는 무욕과 무소유적인 생활이 원칙이었다. 내 것이라고 내세울 수 있는 것은 삼의일발(三衣一鉢)뿐이었고 목으로 넘기는 것은 탁발을 통한 일종식(一種食)뿐이었다. 소유는 욕심을 부르고 욕심은 수행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에서다. 선종은 달랐다. 선(禪)과 노동은 둘이 아니라는 선농겸수(禪農兼修)를 통한 자급자족(自給自足)이 선종의 생활방식이었다. 이것이 선원만의 경제적 독립을 할 수 있는 밑바탕이었다. 이를 제창한 이가 백장선사다.
백장의 언행은 일치하였다. 그는 아흔이 넘는 나이에도 울력(雲力)을 멈추지 않았다. 제자들의 숱한 만류는 소귀에 염불일 뿐이었다. 한날 백장의 이런 모습이 늘 안타까웠던 한 제자가 일을 그만하게 하려고 호미를 감춰버린다. 그리고 그날 공양시간이 다 지나도록 백장은 끝내 보이지 않았다. 여기저기 찾아다니던 제자는 방에서 참선에 든 백장을 겨우 찾고는 묻는다.
“스님 공양시간입니다. 공양 하셔야죠.”
“나는 오늘 하루 일하지 않았으니 먹을 자격이 없다.” 이것이 일일부작 일일부식이다.
지난 보름날 찾았던 마야사에는 매화가 한창이었다. 대중들의 울력(雲力)도 한창이었다. 수국나무 500수를 텃밭에 옮겨 심는 일이었다. 얻어먹는 밥값 치루기에 턱없는 미천한 손놀림으로 누도 폐도 되지 않길 바라며 동참하였다. 내 삶이 제아무리 무위(無爲)여도 도식(徒食)하기에는 부끄러웠던 볕 따스한 봄날이었다.
시간의 문앞에서
저작권자 © 충청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