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과/뱀파이어가 만났을 때/제일 먼저 해야 하는 것
난 로봇이야/난 뱀파이어야
자신을/인정하는 것
유하정 동시집 `붉은 고래에게 주는 선물' 중 `사람이 되고 싶다던' 전문이다. 김주환 교수의 `회복탄력성'을 읽는 중에 머리도 식힐 겸 뒤적거린 동시집인데 지금 읽는 책과 조응하는 느낌이다.
로봇과 뱀파이어의 소원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 출발점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이 놓인 현실 속 실존을 직면하는 데서 시작한다. 자신의 존재를 거침없이 커밍아웃할 수 있는 용기는 또 다른 자기 긍정이다.
시도 사람도 외장을 벗겨내야 담백하고 진솔하다.
포장 없이도 당당히 표현할 수 있는 정도라면 얼마만큼의 자기조절능력과 대인관계능력이 높아야 하는 걸까. 이 세상이 제각각 다채로운 사람들로 구성된 세상이지만 살다 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는 건 인지상정이다.
회복탄력성은 자신에게 닥친 온갖 역경과 어려움을 도약의 발판을 삼는 힘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회복탄력성지수는 평균 195라고 한다.
책을 완독한 후 진단지를 제공받아 평가해 보니 230점이 나온다. 상위권의 높은 점수인데도 대인관계능력에서 이따금 딜레마에 빠진다.
서로 다른 층위의 소통능력과 공감능력의 차이다. 깊고 넓은 인간관계를 유지하는 일이 어려운 사람은 자아확장력은 물론 소통능력과 공감능력마저 어렵다. 사람으로 산다는 것, 사회적 자아로 산다는 것, 자신이 속한 사회의 도덕 법규를 따라야 하는 건 마땅한 의무이다. 물론 자기 긍정과 함께 타자 긍정의 밸런스도 맞춰야 할 덕목이다.
사회공동체 일원으로 살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 근육과 근력을 키우는 일이다.
자존감과 회복탄력성 높은 나로 사는 것이 자신은 물론 타자도 행복하게 사는 길이다. 일반적인 자존감은 자신의 품위를 지키며 자기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자기 긍정과 함께 타자 긍정도 할 줄 아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 자존감은 왜곡된 자기애의 병적 나르시시스트와는 구별된다. 하인츠 코헛의 건강한 나르시시즘은 강한 자기 존중과 더불어 타인에 대한 공감능력과 타인의 존재도 인식할 줄 아는 데 있다.
스스로 내리는 자기 평가와 함께 나에 대한 타인의 일반적인 평가의 갭이 크다면 병적 나르시시즘을 생각해봐야 한다. 병적 나르시시즘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고 자신을 특별한 존재로 보기 때문에 삶이 과장되고 과시적이며 타인의 존재를 의식하지 않는다.
자기조절능력(감정조절능력+충동억제력+원인분석력)이 잘 안되면 대인관계능력(소통능력+공감능력+자아확장력)또한 어렵다. 물론 최종 확인은 내 성향이 대체로 부정적인가, 아니면 긍정적인가의 범주도 살펴야 한다.
긍정적인 뇌를 지닌 사람이 회복탄력성도 높은 까닭이다.
로봇과 뱀파이어가 만났을 때 제일 먼저 한 것이 난 로봇이야, 그렇구나, 난 뱀파이어야, 서로 그대로 인정하는 것, 그것은 자기 인정과 타자 인정이 잘됐을 때 나타난다.
공교롭게도 잔잔히 틀어놓은 클래식 중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 곡이 흐르는 중이다.
여전히 이 지구상엔 타자 존재를 의식하지 못하고 자기애에 취한 나르키소스들과 타자 긍정이 힘든 황제들이 많다.
진짜 좋은 사람이 되려면 내가 나를 인정하듯 남도 그렇게 인정하는 데서 출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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