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년을 마치고 학교로 돌아왔다. 새 학기 용기 내어 학부 교양 강의에 도전했다. `비밀의 정원', 캠퍼스 정원을 산책하며 나무, 초화, 이끼, 돌, 열매와 함께 어우러지는 경관과 분위기를 감상하고, 정원에 깃들인 비밀과도 같은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는 강의다.
정원 아니 자연은 시간, 절기, 날씨와 기온에 따라 관상 포인트가 달라진다. 비 오는 날 숲에서 보이는 것, 들리는 것과 쾌청한 날 보고 들리는 것이 다르다. 또 아침 운동장을 가득 채우던 안개가 낮에 사라졌다가 저녁엔 미세한 습기로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더운 여름에 보는 단풍과 가을 청명한 햇빛 속에서 보는 단풍 역시 그 느낌 자체가 다르다. 그러다보니 강의 시작 전 이른 아침과 정오 두 차례 학교를 산책한다. 눈여겨 볼 나무와 풀을 살피고, 강의 중에 어떤 이야기를 나눌지 생각해보는 두 번의 산책은 그 자체로 공부가 된다.
요즘 눈을 붙드는 것은 왕고들빼기다. 왕고들빼기는 자갈 돌 틈이나 길가 어디서나 잘 자라는 야생초다. 이 강의가 `비밀의 정원'이고, 정원은 원예 식물 그러니까 사람이 육종하여 보급하는 재배 식물 위주니 야생초까지 다루려나 싶겠지만 우리 강의는 그야말로 하이브리드다.
왕고들빼기는 야생미 넘치는 잎 모양, 서식지를 가리지 않는 엄청난 번식력 등 야생초가 갖추어야할 모든 조건을 탁월하게 갖추고 있는데다 덩치까지 어마어마하다. 성인의 평균 키를 훌쩍 넘는 2미터까지도 자란다고 하니 이러한 특징 때문에 황대권은`야생초편지'에서 왕고들빼기를 야생초의 왕이라 칭하기도 했다.
이 압도적인 크기의 왕고들빼기는 사실 유럽의 재배종 상추(Lactuca sativa)와 같은 속, 그러니까 같은 성을 쓴다.
왕고들빼기를 영어로 인디언 상추(Indian Lettuce)라 하고 중국에서는 산와거라고 한다. 와거가 상추니까 산, 야생에서 나는 상추라는 뜻이다. 상추 잎맥을 꺾으면 쓴 맛이 나는 흰 유액이 나오는 것을 본 적이 있을 텐데, 바로 이 흰 유액(lactose)에서 속명인 락투카(Lactuca)가 나왔다. 왕고들빼기는 상추처럼 쌈으로 먹기도 하고 김치나 나물로 해먹기도 하며 뿌리는 약재로 쓰는데 해열이나 종기를 없애는 효능이 있다고 한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상추가 도입되기 전에는 왕고들빼기를 쌈으로 애용했을 거라는 추측도 있다.
그럼 우리가 아는 고들빼기와 왕고들빼기는 만두와 왕만두처럼 크기의 차이를 이름에 반영한 것일까? 고들빼기와 왕고들빼기는 모두 국화과 해넘이한해살이풀이다. 그러나 고들빼기의 학명은 Youngia sonchifolium으로 융기아 즉 고들빼기 속이고, 왕고들빼기는 락투카 속, 즉 성씨가 다르다. 우리말 이름 왕고들빼기는 고들빼기를 차용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연원은 옛날에는 흰민들레, 방가지똥 등 고들빼기처럼 잎과 뿌리를 이용해 김치를 담아먹던 식물류를 고들빼기와 비슷한 이름으로 불러온 데서 찾을 수 있다. 고들빼기가 쓴 뿌리 나물이라는 뜻의 고돌채에 그 어원이 있는데, 왕고들빼기처럼 잎에서 쓴 뿌리까지 먹는 나물에는 범용하여 그 이름을 쓴 것으로 보인다.
왕고들빼기가 눈을 붙든 것은 그 꽃 때문이다. 꽃 색은 연한 노란색인데, 흔히 볼 수 없는 우아하고 수수한 빛이다. 고들빼기처럼 샛노랗지도 않고 딱 곤충 눈에 들만큼의 색으로 멋을 냈다. 그 아름다운 색을 사람 손으로 낼 수 있을까 싶게 편안하고 좋다. 지금이 딱 왕고들빼기 꽃을 볼 때다.
왕고들빼기 꽃이 피면 추석이라는 말이 있다. 척박하고 비좁은 곳에서도 굳건히 서서 추석 인사를 건네는 왕고들빼기를 만나보자. 태어난 자리를 원망하지 않고, 그 곳에서 할 수 있는 한 가장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그가 우리에게 건네는 인사, 참 다정하다.
다음 산책에서는 어떤 식물이 우리 발을 멈추게 할런지, 가을, 기대된다.
교육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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