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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선가(禪家)에는 ‘양변(兩邊)을 여의라’는 말이 있다. 크고 작음, 있고 없음, 멀고 가까움, 친하고 친하지 않음 등의 상대적 변견(邊見)인 대소유무(强弱有無) 원근친소(遠近親疎)가 바로 양변이다. 그런데 양변을 여의라는 것이, 무조건 양변은 나쁜 것이니 버려야만 한다는 주장일까? 그 같은 주장이라면 그 또한 양변에 떨어진 채, 훔친 마이크에 대고 결백을 주장하는 짓이며, 의자에 앉아서 의자를 들려는 짓과 다르지 않다. 양변은 나쁜 것이고 양변을 여의는 것이 좋은 것이란 견해 자체가 이미 지독한 이분법적 변견이다. 그 같이 주장하는 자체가 바로 양변에 빠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깨달음을 향한 하나의 이정표로 자리 잡고 있는 ‘양변을 여의라’는 가르침의 진의(眞意)는 무엇일까?
과거의 온갖 경험을 축적하고 있는 기억 뭉치인 업식의 ‘나’가 일으키는 옳고 그르고, 좋고 나쁘고 등의 분별 망상을 쉬라는 것이 양변을 여의라는 말의 속뜻이다. 온갖 악지악각(惡知惡覺)의 저장 창고인 업식의 ‘나’가 팔이 안으로 굽은 채 일으키는 분별 망상을 쉬어야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양변을 여의라는 것은 단순히 양변을 여의기 위함이 아니다. 양변을 여읜 가운데 양변에 걸림 없이 양변을 씀으로써 대기대용(大機大用)하라는 말이다. 언제, 어느 곳에서나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키며 물처럼 흘러가는 무애자재(無碍轻松)한 삶을 누리라는 말이다. 비유하자면, 0점 조정이 잘 된 저울이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정확하게 무게를 재듯, 양변을 여읜 0의 마음으로 대소유무 시종선후(始終先後)를 가리면서 그때그때 상황에 맞게 양변을 쓰는 정견(正見) 정사유(正思惟) 정어(正語) 정행(正行)의 올곧은 삶을 영위하라는 말이다.
업식의 ‘나’가 일으키는 온갖 견해인 대소유무 원근친소 등의 양변을 여의지 못한 마음은 출렁이는 호수와 같다. 스스로 출렁이는 까닭에 호숫가에 고요히 있는 나무까지 흔들리는 것으로 비추어짐에 따라, 가만히 있는 나무가 심하게 요동치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게 된다. 자라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라는 격과 다르지 않다. 양변을 여읜 마음은 고요한 호수와 같다. 고요한 호수는 애써 분별 망상을 피우지 않아도 저절로 반야의 지혜로서 나뭇잎의 미세한 흔들림까지 있는 그대로를 비춘다. 이처럼 대소유무 양변을 여읜 고요한 마음이라야 대소유무 양변을 자유자재로 쓸 수 있다. 결론적으로 대소유무 양변을 여의라는 말은, 단순히 양변을 여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여읨이 목적이 아니다. 양변에 걸림 없이, 자유자재로 양변을 쓰기 위해 양변을 여의라는 말이다. 사상(四相)을 여의고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일으켜 쓰라는 금강경의 가르침과도 다르지 않다.
좋고 싫고 멀고 가깝고 밝고 어둡고 등의 양변을 여의라는 말은, 이미 자신의 입맛에 익숙한 왜곡된 잣대로 세상을 바라보는 편협된 시각과 그에 따른 생각 및 판단 등을 쉬고 또 쉼으로써 순수의식을 회복하라는 의미임을 알 수 있다. 이를 불교에서는 나 없음의 무아를 깨닫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기독교는 제 안의 온갖 주견을 비워내고 심령이 가난한 자로 거듭나는 것이라고 역설한다. 0점 조정이 되어 있지 않은 저울로 무게를 잴 수 없듯이, 양변을 여의고 0점 조정되어 있지 않은 마음으로는 세상을 정확하게 보고 판단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양변을 여의고 0점 조정된 지공무사한 마음으로 자신의 만족과 이득을 훌쩍 벗어나,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그른 것은 그르다고 하며, 아는 것은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하는 아름다운 중도 및 중용의 길을 걸어가는 눈 밝은 이들로 넘쳐나는 지구촌이 도래하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