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 日 강제징집 후 탈출
임시정부서 해방전쟁 준비
고향서 애국정신 전파 헌신
광복회 충북지부장 등 역임
“애국선열 숭고한 희생정신
젊은세대, 가슴에 새겨야”
충북도내 유일 생존 애국지사인 오상근 선생(95·진천군·사진)도 일제 식민 치하 속에서 기구(崎嶇)한 삶을 살아야 했다.
진천군 출생인 오 선생은 만 18세가 되던 해인 1942년 일본군에 강제 징집됐다. 당시 아내와 딸이 있었지만, 눈물을 머금고 생이별을 해야만 했다.
그는 평양으로 끌려가 고된 훈련을 받았다. 훈련이 끝난 뒤엔 중국 계림에서 작전을 수행 중인 아라시 부대에 배치됐다.
하지만 오 선생은 곧바로 동료 4명과 필사의 탈출을 시도했다. 일본을 위해 목숨 바치는 것은 조선인으로서의 자존심을 버리는 일이라고 생각해서다.
탈출 과정은 험난했다. 뜻을 함께한 동료 한 명이 목숨을 잃는가 하면 중국 현지에서 `일본군 스파이'로 몰려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동료를 잃은 아픔을 잊을 새도 없이 중국에서 일본군 스파이로 몰려 감옥살이를 해야 했어요. 당시 보급이 끊긴 일본군이 약탈과 같은 온갖 악행을 저지르는 바람에 중국인들의 분노가 극에 달했던 탓이죠.”
오 선생은 숱한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야 중경 임시정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오 선생은 반세기가 훌쩍 지난 지금도 당시 느꼈던 감정을 잊을 수 없다고 한다.
낯선 땅에 우두커니 서 있는 태극기. 태어나 처음 `전율'을 느낀 순간이다.
“중경에 도착해서 태극기가 걸린 임시정부 청사를 봤을 때 가슴 한편에서 뜨거운 사명감이 느껴졌어요. 광복군에 입대해 내 나라 대한민국을 위해 죽겠다는 결심을 세운 시점도 이때였습니다.”
광복군에 투신한 그는 총사령부 경위대 소속이 됐다. 김구 선생 등 임시정부 요인과 그 가족을 경호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동시에 미국 OSS부대와 함께 훈련을 받으며 `해방 전쟁'을 준비했다.
그러나 오 선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고국으로 돌아와야만 했다. 1945년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하면서 광복군도 자연스레 해체 수순을 밟은 까닭이다.
“광복은 두 손을 들고 환영할 일이었지만, 우리가 직접 이뤄내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두고두고 남습니다. 우리 손으로 광복을 이뤄냈다면 나라가 둘로 나뉘는 아픔도 없었을 텐데…”
조국으로 돌아온 오 선생은 그 길로 귀향해 광복회 충북도지부장 등을 맡아 애국선열 정신을 널리 알리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는 말한다. 두 번 다시 치욕의 역사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나라를 뺏기는 아픔을 겪지 않으려면 젊은 세대가 앞장서 역사를 바로 세워야 해요. 애국선열의 숭고한 희생의 의미를 가슴깊이 새겨야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오상근 선생은 1924년 1월 25일 진천군 백곡면 성대리 414번지에서 태어났다. 일본군에 강제 징집돼 고난을 겪다가 탈출, 광복군에 투신했다. 대통령 표창(1963년)과 건국훈장 애족장(1990년)을 받았다.
/조준영기자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