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지 못한 노란 손수건
걸지 못한 노란 손수건
  • 이영숙 시인
  • 승인 2024.06.09 16: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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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 엿보기
이영숙 시인
이영숙 시인
 

이게 뭐라고 과실수에 노란 봉투를 씌우는 작업이 이토록 숙연할 일인가. 농장 밭둑 가장자리 복숭아와 사과나무에 노란 봉투를 씌우는 일로 하루가 뉘엿뉘엿 저문다. 어느덧 아침 동살은 서쪽 하늘로 옮겨 황혼 등을 걸어놓고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가는 많은 이의 가슴에 흑백 기차를 띄운다. 한 장 남은 봉투까지 정성껏 씌우고 밭둑에 앉아 서쪽 하늘을 바라본다.

“형기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당신이 아직도 나를 원한다면 마을 앞 오래된 참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주세요.”

늙은 죄수 빙고가 뉴욕의 교도소에서 긴 시간을 복역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그의 간절함은 마을 앞 오랜 참나무에 노란 손수건이 걸렸는지 확인하는 일이다.

1980년대 격동기를 살아온 386세대들에게 영화 <집으로 가는 길>의 `노란 손수건'은 저마다 남다른 추억으로 자리한다. 1973년 토니 올랜도와 던(Tony Olando & Dawn)이 만든 `오래된 참나무에 리본을 달아주세요(Tie a yellow ribbon the old oak tree)'는 연인들 사이에 유행처럼 번진 노래다.

기타 연주에 실린 흥겨운 멜로디는 세월을 3배 속으로 빨리 감은 지금 덤덤하게 액자 속 영화와 소설로 떠올리지만, 여전히 영화도, 노래 가사도 되지 못하고 저마다의 가슴에 꼬깃거리는 노란 손수건을 지닌 채 살아가는 현실 속 `응답 못 한 386세대'들의 앨범 속 아픔도 많다. 그것이 개인적이든 사회적이든 걸지 못한 노란 손수건은 여전히 가슴 저린 상징이다.

보편적 공리로 묻혀버린 소수들, 딜레마 논리로 희생당한 약자들, 그들이 그토록 기다린 노란 손수건은 여전히 접힌 채로 이 시대 서쪽 하늘을 맴돈다.

올봄 골라 심고 시원찮아 버린 씨감자가 두엄 탕에서 감자밭 감자보다 더 실하게 맺히는 걸 보면 저마다 지닌 인식 틀과 왜곡된 안목들이 빚은 상처도 개인마다 혹은 공적마다 무더기일 터이다.

복숭아 봉투는 나뭇가지에 묶고 사과 봉투는 꼭지에 묶어 씌우는 등 과실수도 저마다 농법들이 다 다른데 하나로 퉁 치려는 우리 안의 보편화, 일반화 논리들도 만만찮다. 우열, 강약 논리 아래 종량제 봉투로 버려진 것들, 그 자체를 목적으로 대하지 않는 험악한 경제 가치들, 돌연변이의 잠재적 가능성을 인정하지 않는 이 무지한 인식 틀로 놓친 큰 가치들이 너무 크다.

진작 독서를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사유가 깊었다면, 변이 항목들을 눈여겨 볼 줄 알고 적시에 노란 손수건을 걸 타이밍을 놓치지 않았을 텐데, 사적인 것이든 공적인 것이든 때를 놓쳐 걸지 못한 노란 손수건이 많다.

워런 버핏은 하루 80%를 독서로 보낸다. 그는 사업적으로 성공한 원인 중 가장 큰 항목을 독서로 꼽는다. 다른 사업가들보다 더 많이 읽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매일 많은 시간을 앉아서 성찰하는 데 활용한다니 사업 번창의 창의는 거기로부터 촉발된다. 그렇게 다진 깊은 사유와 통찰로 언제 어디서 어떻게 왜 노란 손수건을 걸어야 하는 지도 잘 아는 것이 아닐까.

내가 작아서 놓아버린 것들, 미처 걸지 못한 노란 손수건을 속죄라도 하듯 온종일 복숭아, 사과나무에 노란 봉투 걸던 날, 그 자그마한 몸통에서조차 소우주 잘다방거리는 소리를 들어야 할 내 개인의 숙명과 시인의 숙명을 되새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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