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간 101주년이 된 신문이 있다. 서울신문(대한매일신보, 1904년)이나 조선일보(1920년), 동아일보(1920년)에 버금가는 역사다.
삼일운동을 기념해 1923년 3월1일에 창간했다. 이 신문의 창간 당시 제호는 그래서 `삼월일일'이었다. 운명이 예사롭지 않았을 이름이다. 그런데 101년이나 됐다고?
이 신문은 지금 한국에 없다. 아니 처음부터 한국에 있지 않았다. 일제에 싸우기 위해 연해주로 건너갔던 독립운동가들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창간했다. 지금은 더 먼 데에 있다. 스탈린이 `조선 사람들과 일본 사람들을 구분하기 어렵다'라며 양국의 전장(戰場)인 연해주에서 머나먼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기 때문이다. `일제의 간첩들'이란 누명을 씌웠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화물칸에 선반을 놓고 짐짝을 싣듯 차곡차곡 실어 보냈다.
18만명이 그렇게 기차를 탔고, 3만명 정도가 기차 안에서 얼어 죽거나 굶어 죽었다.
고려인들의 봇짐 속에는 애지중지하는 볍씨도 있었고, 이 신문의 한글 활자도 담겨 있었다.
1937년 가을, 겨울에 중앙아시아에 도착했고, 이듬해 5월부터 카자흐스탄 크즐오르다에서 다시 신문을 찍기 시작했다.
`삼월일일'에서 `선봉' `레닌기치' 등으로 이름을 바꾼 이 신문은 지금은 알마티에 있는 고려일보다. 고려일보는 동포들의 이주사를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다. 모국을 떠나 왔지만, 우리의 전통과 풍습을 유지하는 한편 현지의 문화와 융합하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가는 과정을 기록해왔기 때문이다.
1938년~1939년 사이에는 `오라비를 찾소', `친척을 찻소', `족하(조카)를 찾소' 등 사람 찾는 광고가 유난히 많은데, 이는 이주 후 1938년부터 1940년까지 거주 여건이 좀 더 나은 곳 또는 헤어진 가족들을 찾아서 중앙아시아 내에서 또 한 번의 이주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당시 고려인 꼴호즈(구 소련 집단농장)의 주택건축비가 800만 루블이라는 사실도 신문을 통해 알 수 있고 벼농사 생산 기록을 세운 고려인 농부에 관한 인터뷰 기사, 꼴호즈 간 축구 경기 기사, 극작가 태장춘의 `행복한 사람'이라는 연극이 무대에 올려졌다는 기사를 통해서는 고려인들이 중앙아시아에 점차 뿌리를 내렸음을 짐작하게 한다.
1941년 히틀러의 갑작스러운 침공으로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73세였던 홍범도 장군은 11월7일 자 `원쑤를 갚다'라는 칼럼을 통해 “나의 마음은 지금 파시스트들과 전쟁한다”라고 말하고 있다. 1943년 10월25일에 작고한 홍범도 장군의 부고도 이틀 뒤 이 신문에 실렸다.
`고려일보'의 100년을 요약해 보았다. 100% 한글판이던 일간 고려일보는 현재 타블로이드 16면에 한글과 러시아어 혼용 신문으로 바뀌었다. 더는 우리글로 기사를 쓸 수 있는 사람을 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김 콘스탄틴 주필이 귀띔했다. “창간 100주년이 되던 작년(2023년)에 윤석열 대통령에게 초청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당연히 기념행사에 올 수는 없을 거로 생각했지만, 회신조차 없을 줄은 몰랐습니다. 카자흐스탄 대통령도 축전을 보냈는데, 대한민국 대통령이나 재외동포청은 축하메시지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고려일보 제호 아래 `뿌리를 잊지 말자'라는 사시는 우리를 숙연케 한다.
이글은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쓴다. 이곳에 있는 동안 뉴라이트 인사 김형석씨가 독립기념관장이 됐다는 뉴스를 들었다.
그는 “그릇된 기록으로 인해 친일파라고 매도된 사람들이 있어서는 안 된다”라고 공언했다. 우리는 오늘 밤, 만감을 싣고 비행기에 오른다. 내일 조간신문과 함께 `아, 대한민국'에 도착하겠다.
화요논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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