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엄한 죽음
존엄한 죽음
  • 정정옥 수필가
  • 승인 2024.09.02 15: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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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어르신 콧줄 또 빼셨어요. 아이고 진짜, 응급실 또 가셔야 될 것 같습니다”

요양원에 있는 동생이 또 콧줄을 뺐다는 연락이다.

끝까지 콧줄만은 거부하고 싶었다. 차라리 링거로 연명할망정 아무런 희망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에서 꾸역꾸역 영양식을 넣어주는 일만은 피하고 싶었다.

의식도 없이 고단백 환자식(食)으로 일 년 넘게 견디다 가신 부모님을 보았기에 더욱 그랬다.

그런데도 막다른 골목에 이르자 콧줄을 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 되어버렸다.

어느 집이나 말 못 할 사연은 있고 피붙이 중에도 유달리 아픈 손가락이 있다.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사는 일이 순탄치 않았던 동생이 그랬다.

십 년 전이다. 경찰서로 행정복지센터로 갈마들며 연락이 끊겼던 둘째 남동생을 겨우 찾았다. 요양원에서였다.

나는 사지육신 멀쩡했던 동생이 휠체어에 앉아 있는 모습에 오열했고, 동생은 몇 년 만에 보는 피붙이가 반갑고 서러워 오열했다. 그날 이후 무연고로 요양원에 입소했다는 동생의 보호자가 되었다.

내 혈육이니 자식도 마누라도 없는 동생의 보호자가 되는 것은 당연하고도 기꺼운 일이었다.

코로나 19가 오기 전까지는 저 좋아하는 음식을 싸 들고 일주일이 멀다 하고 면회를 갔다.

요양원에서 제공되지 않는 생필품이나 약을 사다 달라는 연락이 오면 한달음에 달려갔다.

그러나 코로나 19 팬데믹이 시작되면서 모든 것이 비대면 체제로 바뀌고 음식을 싸 갈 수도 손을 잡아 볼 수도 없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 동생은 시들어가는 풀잎이 되었다. 작은 터치로도 부서질 것만 같다. 자는 모습을 보면 앙상한 뼈가 그대로 드러나 흡사 미라 같다.

코로나도 두 번이나 감염되어 격리병동에 입원해야 했고, 올해는 폐렴과 청색증으로 열흘씩이나 중환자실에 입원해야 했다. 중환자실에 입원한 다음 날 면회를 갔더니 간호사가 “어제보다 많이 좋아지셨어요” 했다.

그런데 반가워야 할 그 말에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중환자실에서 똘망똘망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동생을 보자 좋아졌다는 말에 기뻐하지 못한 나 자신이 죄스러워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면회시간이 끝나기도 전에 밖으로 뛰쳐나와 펑펑 울었다.

담당 의사는 이제 입으로 음식을 삼키는 것은 위험하니 콧줄을 삽입하자고 했다. 응급실로 오던 날 분명히 콧줄을 비롯 어떠한 연명치료도 원치 않는다고 서명했음에도 의사 입장은 또 달랐다. 의사에게 동생은 살아있으므로 느낄 수 있는 유일한 낙이 먹는 것인데 그것마저 못한다면 살아있는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었다. 담당 의사는 이 상태로는 요양병원으로 갈 수밖에 없다. 거기 가더라도 콧줄은 해야 할 것이라고 했다. 동생이 의사 표현은 확실하니 동생의 의사를 물어보고 결정하잔다. 동생에게 콧줄을 해도 되겠느냐 싫으면 손사래를 하라고 하니 눈을 껌뻑껌뻑했다. 그렇게라도 더 살고 싶었는데 지금은 아닌 걸까?

안정을 찾은 동생은 머물던 요양원으로 퇴원했다. 삼키는 것이 힘들어 양껏 먹을 수 없었는데 콧줄을 하고 영양식을 넣어주니 얼굴도 한결 좋아지긴 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으랴. 가장 원초적인 생리현상까지도 제 의지대로 할 수 없는 것을.

동생을 보면서 `존엄한 죽음'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졌다. 마음이 급해져 보건소에 가서 `사전연명의료 거부신청'도 했다.

이러나저러나 오늘 밤이라도 동생이 하늘나라로 가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나는 인정머리 없는 매정한 누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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