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삐 풀린 세월마차'라는 이름표를 단 포장마차가 있었습니다. 복개공사로 이면도로가 된 가장자리에 줄지어 늘어선 포장마차들 중 한 곳이었는데 이름에 홀려서 들어섰다가 단골이 된 포장마차였습니다.
도시정비사업에 밀려 사라진지 오래이지만 젊은 시절 포장마차는 술이 고픈 가난한 샐러리맨들에게는 오아시스나 다름없었습니다.
소주에 안주라곤 어묵과 번데기 닭발 두부김치 낙지 멍게 해삼이 전부였지만 포장마차에는 고된 일과로 파김치가 된 직장인들의 꿈과 희망이 서려있었고, 주당들의 개똥철학과 낭만이 오갔습니다.
그 포장마차가 근무하던 도청에 인접해 있어서 야근 후에 들리기에 안성맞춤이었고, 으스름 밤에 한잔 걸치면 스트레스도 풀리고 간도 커져 하루가 멀다 하고 들락거렸지요.
방석집이나 룸살롱에서 젊은 여종업원들이 따라주는 비싼 술과 안주로 희희낙락하고 있을 고관들과 목에 힘주던 지역유지들을 안주삼기도 하고, 불의에 눈감고 상사에게 잘 보이려했던 부끄러움을 술로 씻고 자위했던 가슴시린 곳이기도 합니다.
그렇게 `고삐 풀린 세월마차'에서 술을 마시고 있는 시간만큼은 말단공무원이 아닌 고삐가 풀린 청춘이고자 했습니다. 그랬던 제가 청춘을 송두리째 바친 공직에서 물러난 지도 어언 13년이 되었으니 세월 참 빠르고 덧없습니다. 말이 끄는 세월마차에 올라탔고, 고삐마저 가 풀렸으니 그러려니 합니다.
각설하고 고삐는 말이나 소를 몰거나 부리려고 재갈이나 코뚜레 또는 굴레에 잡아매는 줄을 이릅니다.
말의 입에 가로 물리는 쇠가 재갈이고, 소의 코청을 꿰뚫어 끼는 나무 고리가 코뚜레인데 사람들이 여기에 고삐를 매달아 말과 소를 의도한대로 부립니다.
말이 끄는 수레가 마차인데 여기에 흘러가는 시간인 세월을 실었으니 세월마차입니다. 그 세월마차에 고삐가 풀렸으니 천방지축으로 날뛰기도 하고, 더러는 세월아 네월아 하고, 허송세월도 할 터입니다.
살아보니 말과 소에만 고삐가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에게도 고삐가 있었습니다. 하느님이 인간에게 심어주신 양심과 10계명이 고삐였고, 인간들이 합의하여 만든 공중도덕과 법과 제도와 규칙 등이 고삐였습니다.
재갈 물린 말과 코뚜레를 한 소가 고삐 풀리면 제멋대로 날뛰어 통제하기 어렵듯이 인간의 삶도 고삐가 풀리면 난리법석이 나고 아비규환이 됩니다.
또 고삐가 풀린다는 건 느슨해진다는 것이고 제멋대로 산다는 것입니다. 일과 관계와 목표에서 아옹다옹하지 않고 바람 불면 바람 부는 대로 물결치면 물결치는 대로 산다는 겁니다. 살다보면 과거가 현재나 미래의 고삐가 되기도 합니다. 과거에 발목 잡혀 수난을 겪는 정치인들과 유명연예인들이 이를 웅변합니다. 그러므로 귀감이 되지는 못할지언정 지탄 받을 짓은 않고 살아야 합니다.
연인들끼리는 스스로 원해서 고삐를 매기도 합니다. 사랑이 뜨겁게 불타오를 때의 고삐는 아름답지만 사랑이 식으면 고삐는 걸림돌이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고삐나 진배없습니다. 삶의 질과 가치를 돈이 쥐락펴락하고, 있는 자가 없는 자의 코뚜레를 채우고 고삐를 잡고 흔드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국가 간에도 기업 간에도 고삐가 존재합니다.
고삐 잡는 나라와 고삐 매단 나라가 있고, 고삐 잡는 기업이 있고 고삐 매단 기업이 있습니다. 고삐 잡는 나라와 기업은 갑이고 고삐 달린 나라와 기업은 을입니다. 을이 강해지면 고삐가 풀리고 갑은 통제력을 잃습니다. 인간사회에서 고삐는 의무이고 질서이고 책임이기도 합니다. 그 고삐가 무겁고 버거워 불가에서는 인생을 고해라 이릅니다.
하여 살만큼 살았으니 고삐 풀린 인간이고 싶습니다. 고삐 풀린 세월마차를 타고 어디론지 떠나고 싶습니다. 아니 고삐 풀린 채로 늙어가고 싶습니다.
고삐 풀린 세월마차가 종착역에 닿을 때까지 치매 걸리지 않고, 요양원에 가지 않고 살다 가면 더할 나위 없겠지요. 그대도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시인·편집위원
김기원의 목요편지
저작권자 © 충청타임즈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