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천의 대표적 명소 박달재 전설
제천의 대표적 명소 박달재 전설
  • 김명철 전 제천교육장
  • 승인 2023.09.04 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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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북 역사기행
김명철 전 제천교육장
김명철 전 제천교육장

 

`천등산 박달재를 울고 넘는 우리 임아/ 물항라 저고리가 궂은 비에 젖는구려/ 왕거미 집을 짓는 고개마다 굽이마다/ 울었소 소리쳤소 이 가슴이 터지도록/ 부엉이 우는 산골 나를 두고 가는 임아/ 돌아올 기약이나 성황님께 빌고 가소!'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이렇게 시작하는 가요 `울고 넘는 박달재'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반야월(진방남) 작사 김교성 작곡으로 1948년에 발표된 이 노래는 박재홍 가수가 불렀는데,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노래 1위로 선정되기도 하였다. 그러한 인연으로 `울고 넘는 박달재'는 제천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박달재에는 재미있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전설지'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조선시대 경상도의 젊은 선비 박달(朴達)은 과거를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도중 제천 백운면 평동리에 이르렀다. 마침 해가 저물어 박달은 어떤 농가에 찾아들어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집에는 금봉이라는 과년한 딸이 이었다. 사립문을 들어서는 박달과 눈길이 마주쳤다. 박달은 금봉의 청초하고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잃을 정도로 놀랐다. 금봉은 금봉대로 선비 박달의 초초함에 마음이 크게 움직였다. 그날밤 삼경이 지나도록 잠을 이루지 못해 밖에 나가 서성이던 박달도 역시 잠을 못이뤄 밖에 나온 금봉을 보았다. 아무리 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는 선녀와 같았다. 박달과 금봉은 금새 가까워졌다. 이튿날이면 곧 떠나려던 박달은 더 묵었다. 그러면서 박달이 과거에 급제한 후에 함께 살기를 굳게 약속했다. 서울에 온 박달은 자나깨나 금봉의 생각으로 다른 일을 할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금봉을 만나고 싶은 시(詩)만을 지었다. 난간을 스치는 봄바람은 이슬을 맺는데 구름을 보면 고운 옷이 보이고 꽃을 보면 아름다운 얼굴이 된다. 만약 천등산 꼭대기서 보지 못하면 달 밝은 밤 평동으로 만나러 간다. 과장(科場)에 나가서도 마찬가지였다. 결국 박달은 과거에서 낙방을 하고 말았다. 박달은 금봉을 볼 낯이 없어 평동에 가지 않았다. 금봉은 박달을 떠내 보내고는 날마다 서낭에서 빌었으나 박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침내 박달이 떠나간 고갯길을 박달을 부르며 오르내리던 금봉은 상사병으로 한을 품은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금봉의 장례를 치르고 난 사흘 후에 낙방거사 박달은 풀이 죽어 평동에 돌아왔다. 고개 아래서 금봉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박달은 땅을 치며 목놓아 울었다. 울다 얼핏 고갯길을 쳐다본 박달은 금봉이 고갯마루를 향해 너울너울 춤을 추며 달려가는 모습이 보였다. 박달은 벌떡 일어나 금봉의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고갯마루에서 겨우 금봉은 잡을 수 있었다. 와락 금봉을 끌어안았으나 박달은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져 버렸다. 이런 일이 있은 뒤부터 사람들은 박달의 죽은 고개를 박달재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이다.

박달재는 제천과 충주를 잇는 교통의 요지로 전쟁사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곳이다. 1217년(고종 4) 봄 3만명의 거란군이 침략하였을 때 김취려 장군이 이곳 박달재 부근에서 대승을 거뒀다. 1258년(고종 45)에도 고려의 별초군이 박달재에서 몽골군을 격퇴하고 포로를 구출했다. 외세의 침략에 방패 구실을 하던 박달재는 항일 의병전과 현대의 6·25 전쟁 때는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가 되기도 했다.

제천은 정의로운 고장이다. 조상의 나라 사랑과 외세에 저항한 시민의식은 21세기를 살아가는 우리 학생들에게 교육적으로 큰 의미가 있다. 모든 학생들이 이 정신을 계승 발전하여 히스토리메이커로서 `공부해서 남주는 사람'으로 성장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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