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케, 자연 속에서
베케, 자연 속에서
  • 최지연 한국교원대 초등교육과 교수
  • 승인 2024.10.30 17: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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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현장

제주에 다녀왔다.

가을의 제주는 다양한 색과 질감으로 깊어져 있었다.

쟁기로 밭을 갈던 시절, 돌이 많은 제주에서는 땅을 일굴 때마다 나오는 돌덩이들을 마땅히 처리할 방법이 없어 밭의 경계를 따라 쌓아두었다고 한다.

이 돌들이 시간과 함께 이어지고 쌓여 만들어진 돌무더기, 일정하지 않게 비뚤게 쌓인 이 돌들을 베케라고 불렀다. 베케는 크고 작은 돌들이 무심하게 쌓인 돌무더기이자, 제주에서 살아내려고 묵묵히 노력했던 사람들, 우리 아버지, 어머니의 흔적이다.

이번 나들이의 주인공은 곶자왈, 오름, 습지, 초원, 고사리, 나무, 풀, 이끼, 억새. 돌무더기 베케 틈으로 낀 이끼, 돋아난 고사리, 하늘거리며 흔들리는 사초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지는 이 광경은 사진으로도 담을 수 없어 마음에 간직하고 눈으로 담을 수밖에 없다.

자연에서 우리는 왜 이리 편안할까? 자연에는 직선이 없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직선은 우리 사람들의 선, 자연의 선은 둥글고, 구부러지고, 이어진다.

우리의 면은 직선이 얽혀 만든 크고 넓은 사각의 덩어리, 자연의 면은 그 부드러운 선들이 점처럼 연결되고 이어져 누가 누구를 가리거나 막지 않고 서로 어우러진 곡선의 덩어리가 된다.

그 작은 것들이 무슨 힘이 있을까 싶지만, 작은 눈송이들이 조용히 내리는 새벽, 누구라도 심오한 생각에 빠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가는 선, 작은 점들이 가진 힘은 실로 대단하다.

사람은 시간과 장소에 따라 마음이 달라진다. 운무가 낀 1100고지 습지, 깊은 곶자왈 숲 속에서는 마음이 가라앉으면서 차분해진다. 이끼처럼 조용히 내려앉은 우리 마음이 숲과 하나가 되어 숲의 기운을 공유하는 듯도 하다.

사초가 바람에 흔들리는 초원, 풀밭에서는 어떤가? 생명이 끊임없이 꿈틀대며 요동치는 풀밭에서는 어른이나 아이나 달리고 싶고, 뒹굴고 싶어진다. 풀밭의 힘이 우리에게 고스란히 전달되는 탓이다.

숲 속에서 느낀 고요함과 들판에서의 역동성은 억지로 만들어낸 조용함이나 시끄러운 음악으로 유발되는 역동과는 다른 편안함이 있다.

주변을 아름답게 하는 것, 아름다운 곳에서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다.

이 아름다운 권리이자 의무를 이행하려면 우리가 언제 아름다움을 느끼고, 어디서 편안해지는지 잘 알아야 한다.

그건 자연을 생각해보면 금방 깨닫게 된다. 강하고 끝 간데없이 멋지고 첨단을 달리는 것 말고 만만하고 작고 소박한 것, 바람에 나부끼는 너른 보리밭, 푸른 배추밭, 미나리아재비, 씀바귀, 냉이, 꿀풀들이 뒤섞여 펼쳐진 풀밭, 우리의 눈은 그곳에 머문다.

또 하나, 어렸던 때 우리 눈이 머물렀던 그곳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곳이다. 우리는 작은 꽃송이, 그리고 그 속의 더 작은 곤충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그 신비한 것을 어여쁘게 바라보았었다.

지구별에 처음 온 어린 아이는 모든 것이 신기하고 모든 것이 새로웠다. 파도는 왜 끊임없이 밀려오는지, 나뭇잎은 초록이었다가 가을이 오면 물이 드는지, 왜 이끼는 땅에 덮여 자라는지….

그 아름다웠던 것을 기억한다면 지금 주변을 돌아보자.

욕망으로 가득 찬 주변의 풍경 속에, 원래 그 땅에 살았을 법한 풀, 나무, 꽃, 돌을 그 땅에 돌려주자. 그것이 이 아름다운 지구별에서 길면 100년의 여행을 하는 우리가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일이다.

다음에 이 별을 여행할 사람들을 위해 이 자연스러움, 자연다움을 돌려주는 것 말이다.

이 아름다운 가을날, 볕 좋은 정원에 나가보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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