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이 짧으면 그만큼 한 발자국 나아가라”는 뜻을 지닌 `시단검일보전진(是短劍一步前進)'이란 말을 잊고 지냈었다. 되짚어보니 2020년 6월의 어느 날 돈독히 여기는 군대 후배에게 인사차 카톡으로 보냈던 말이었는데, 내가 속한 커뮤니티의 새로운 리더가 취임 일성으로 똑같은 말을 해서 적잖이 놀랐다.
말에도 인연이란 것이 있지 않을까 싶었다. 누군가가 먼저 쓴 언어가 사라지지 않으려면, 관계의 줄을 타면서 입에서 입으로, 입에서 글로, 글에서 글로, 글에서 입으로 전해져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주어진 환경과 조건을 탓하지 말라고 일침을 놓는 `시단검일보전진'이란 일곱 글자는 나와 인연이 맞닿아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내가 들어서 옮겼던 말을 시간이 흘러 다시 다른 사람을 통해 듣게 되는 경험까지 했으니 말이다.
며칠을 두고 그 말의 뜻과 인연의 오묘함을 곱씹었다. 그래도 먼가 아쉬운 기분이 들어 일을 벌였다. 캘리그라피용 붓펜을 들고는 세로쓰기로 그 말을 종이에 옮겨 적는 일을 감행했던 것이다. 아무리 혼자 놀기라고 해도,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나의 한자(漢字) 글씨는 족보도 계보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언제나 자기만족에 그쳤으므로.
이를 어쩌란 말인가. 아예 한술 더 뜨고 말았다. 글씨를 작은 액자에 넣어 거실에 있는 텔레비전 옆의 협탁(狹卓) 위에 놓았다. 나름 묘수를 짜내어 난초 잎 모양을 띤 식물을 담아 놓은 유리병 곁에 액자를 두었다. 공중으로 뻗어나가다 늘어진 잎이 내 제멋대로 글씨를 조금이나마 가려주는 것도 좋았고, 잎의 생김새가 날렵한 검객의 칼을 떠올리게 해서 즐거웠다.
연거푸 쓰게 되는 말의 인연을 갈무리해 두는 것도 당신의 삶을 싹 틔우는 씨앗 한 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