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꽃이 피는 5월이 지나고 여름이 무장무장 깊어갑니다. 매일 새로운 태양이 떠오르니 새롭게 다시 시작하라는 조언은 정신승리 하는 자기개발서 작가들이 던지는 허언 같아 권태가 아침부터 밀려옵니다. 언제까지 저는 비닐하우스 같은 알 속에서 있게 되는 걸까요? 사회가 말하는 어른의 역할을 할 나이임에도 알속에 갇힌 나를 누군가가 꺼내주기만을 바라는 어린 마음에 신물이 나려고 합니다. 아마도 스스로 깨고 나오려는 간절함이 없기 때문이 아닐까요.
나는 정말 나 밖에 될 수 없는 것일까요? 어릴 적 좋아하던 색깔이나 취향, 즐겨먹던 음식, 혹은 싫어하는 자잘한 것들까지 크게 다르지 않고 그렇게 살아왔던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어요. 살아오면서 어제와 다르고 작년과 다르고 싶어 부단히 애썼던 적이 많았거든요. 결과적으로 살아온 생을 추적해 볼 때 정도의 차이는 있겠으나 그럭저럭 생애초기 그릇에 담긴 저는 여전했답니다. 연필심처럼 날렵하게는 아니지만 그동안 게으른 적 없고 쉼 없이 생산적인 일을 해왔다는 것에 취해 제대로 시간을 내서 내면은 들여다보지 않았다는 걸 알고 좀 놀랐어요. 자본주의에 매몰되지 말자고 자신에게 주문을 걸었지만 어쩌면 저는 상투어로 자신을 위로하는 사악한 재주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자책을 해봅니다. 생계를 꾸리느라 내 서정 따윈 꺼내보지도 않았던 거죠. 이제 삶의 부피보다 밀도가 중요하게 다가오는 시절을 살고 있나 봐요. 높이와 수직을 버리고 깊이와 수평을 향해가는 나이가 되었음을 오래전에 알고 있었지만 자신을 책임질 마음이 없어 여태 어영부영 이렇게 있었는지도 모르겠어요.
미우 작가가 쓰고 그린 <나는 까마귀>를 읽고 있는데요, 꼭 저를 보는 것 같아요. 날개를 다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까마귀는 숲으로 숨어들었고 눈에 띄는 것이 싫어서 이것저것 주워 모아 몸을 꼭꼭 가리는 거 에요. 다른 새들의 깃털로 꾸민 자신이 정말 자기라고 생각하며 살아가는 거죠. 시대와 사회가 원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 자기를 버리려고 부단히 애쓰는 까마귀와 제가 답답했어요. 하지만 누군가는 까마귀의 검정색을 알아봐주는 이도 있더군요. 까마귀의 검은 빛을 향하여 유금빛이나 석록색, 해가 비치면 자줏빛이 되고 비취색으로 바뀐다고 했어요. 푸른 까마귀나 붉은 까마귀로도 불러도 될 만하다며 까마귀를 영험한 존재로 말하는 거 에요. 놀랍지 않나요? 나도 모르는 나를 알아보는 존재가 있다는 경이로움으로 세상은 이렇게 가끔 살고 싶어지나 봐요.
역시, 나처럼 사는 것은 나밖에 없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네요. 하염없이 절망하다가도 누군가의 위로 한 겹이 무겁기만 했던 `나'를 일으키고 걷는 `나'로 거듭나게 합니다. 안도현 시인은 삶은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는 거라고 말했던 대목을 기억하는데 어느 텍스트였는지는 생각이 안 나네요. 맞아요, 삶은 그저 살아내는 거지요. 그러니 오늘의 발견은 새로운 풍경이라기보다는 새로운 관점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겠지요. 새로운 시대란 오래된 달력을 넘길 때가 아니라 내가 당신을 보는, 혹은 당신이 나를 바라보는 서로의 눈동자에서 역동하는지도 모르겠어요. 아무튼 올 풀린 소매 끝처럼 찝찝하고 불안한 밤을 보내고 다시 새벽이 시작되었어요. 새벽공기로 입가심을 하고 세상에 둘도 없는 `나'를 위해 오늘 어떻게 시간을 허비할지 생각하고 있어요. 며칠 전 책 모서리를 접어두었던 글귀를 또박또박 필사하는 것으로 다시 시작해보려고 해요. 짝을 찾는 박새 소리가 요란한 아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