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시대를 지나 조선시대에 이르면 유학이 보편화되면서 청렴결백의 상징인 흰색을 선호하게 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상감, 인화, 철화, 박지, 덤벙, 귀얄 등 다양한 기법으로 문양을 장식하던 분청사기가 점차 사라지고 왕실에서는 백자가 선호되었다. 지방에서도 왕실에 미치지 못하였지만 고령토로 만든 백자가 제작되기 시작하였다.
순백의 백자를 사용한 왕실에서는 이후 아라비아에서 가져온 청화안료를 사용하여 만든 중국 청화백자의 영향을 받아 백자에 코발트로 짙은 보상당초문양을 그린 청화백자를 제작하였다. 그러나 곧바로 조선은 국가에서 운영하는 관요에서 아라비아에서 가져온 비싼 청화안료를 효율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도화서 화원들을 보내어 직접 백자에 청화안료로 그림을 그리게 하였고 이러한 결과 당시 제작된 청화백자에서는 매화, 대나무, 소나무 등 조선에서 유행하던 화풍의 그림이 그려졌다.
그러던 조선은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을 겪은 후 국가의 재정이 어려워지고 관요는 황폐화되었다. 당시 “사옹원에서 아뢰기를 조정의 연향용 화준이 난리를 치른 뒤 하나도 남아 있는 것이 없으므로 청화안료를 구입하여 구워내려고 했습니다만 사 올 길이 전혀 없었습니다. 연향례가 있을 때마다 어쩔 수 없이 가화(假畵)를 사용하는 등 구차하기 짝이 없었습니다.” 이와 같은 기록과 같이 왕실에서는 청화백자를 원했지만 중국에서의 코발트 수입이 어렵게 되어 청화백자를 생산하지 못하게 되었고 부득이하게 산화철로 그림을 그려 넣은 철화백자가 제작되었다.
철화백자에 사용되는 철화안료는 고려시대 청자에서부터 조선시대 분청사기까지 도자기의 문양을 장식하는 방법으로 오랜 기간 사용되었고 우리나라 어디에서도 구할 수 있는 산화철을 원료로 한다. 그러하기에 늘 모든 도자기에서 사용되었고 주변에서도 싶게 구할 수 있어 손쉽게 도자기로 제작되었다. 그러나 이 시기에 이르러 철화백자가 처음으로 도자기의 중심으로 우뚝 서게 되었다.
임진왜란 이후 관요에서는 철화안료를 사용하여 용문, 대나무 등의 문양을 그려 익살스러우면서도 격조 높은 철화백자가 제작되었다. 지방에서도 세련되지 않았지만 건강하고 당당한 지방의 특징을 잘 담겨진 철화백자가 제작되었다. 이러한 조선시대 지방 철화백자가마의 특징으로 잘보여주는 가마로는 충주 하구암리 사기점골 가마터를 들 수 있다.
충주 하구암리 사기점골가마터에서는 자기가마 1기가 조사되었으며, 가마 주변으로는 유물 폐기장이 확인되었다. 자기가마는 아궁이와 2개의 번조실이 남아 있으며, 전체적인 형태는 비교적 길고 급경사를 이루는 아궁이가 있고 아궁이와 번조실 사이에 불창기둥이 있는 오름칸가마(登窯)로 추정된다. 특히, 그릇을 굽는 번조실 내부에는 도지미와 백자편들이 깔려 있어 번조 당시의 상황을 잘 보여준다.
충주 하구암리 사기점골가마터에서 제작된 백자는 발, 접시, 종자, 호 등 일상 생활에서 사용되었던 그릇이며, 많은 수가 확인되지 않았으나 철화안료로 간략하게 그린 철화백자도 제작되었다. 제작된 백자는 대부분 거칠게 제작하여 굵은 모래를 그릇 사이에 받쳐 포개어 구웠다. 특히, 철화안료로 그린 철화백자는 붓을 사용하여 철화안료를 묻힌 후 짧고 강한 필치를 여러 번 찍어 풀과 꽃을 간략하게 표현하였다. 이러한 철화문양은 관요에서 그려진 용, 대나무, 포도, 매화 등과 같은 세련된 문양은 아니지만 우리 지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풀과 꽃을 간략하고 추상적으로 표현한 것으로 우리 지역의 철화백자 특징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이와같이 조선시대 중기는 임진왜란과 같은 외부적 충격에서 벗어나 조선만의 새로운 문화를 창조하는 시기였으며, 지방에서도 중앙과는 다른 지역만의 문화가 자리 잡는 시기였다. 대표적인 이 시기의 철화백자가마인 충주 하구암리 사기점골가마터는 조선시대 중기에 충북의 지역색을 잘 보여주는 자기가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