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단한 짐을 챙긴다. 소지품이라고 해봐야 휴대전화, 안경, 읽던 책, 보조배터리, 물, 손수건 등이다. 길을 떠날 때는 눈썹도 떼어 놓고 가라고 누군가 말했다지. 헝겊 가방에 주섬주섬 최소한의 물건들을 집어넣으며 의연한 마음이 드는 건 왜일까.
어젯밤 급작스레 나와의 여행을 계획하면서부터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마침 오늘 아무 일정이 없으니 일단 혼자서 어디로든 떠나보기로 했다. 여느 때처럼 시끌벅적한 아침이 지나가고 가족들이 모두 집을 나서자 곧바로 행동을 개시했다. 민첩하게 집안 점검을 마치고 날쌔게 차 키를 집어 들었다.
얼마 전 때때로 혼자 여행을 떠난다는 지인의 말에 흠칫 놀랐다. 어쩐지 언제 만나도 자신감 넘치고 여유 있어 보이는 모습이 매력 있다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역시 진정한 멋은 내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모양이다. 그녀가 노트북과 책을 잔뜩 싸 들고 가서 1주일쯤 머물다 온다는 먼 바닷가 마을을 상상하며 무척이나 부러웠지만, 나도 모르게 머리를 가로저었다. 자신 없었다.
혼자 식당이나 카페에 들어가 본 적도 없는 내가, 홀로이 숙소를 잡고 단 하룻밤이라도 편히 머물 수 있을까. 편히 머물기는커녕 뜬눈으로 밤을 새우다가 날이 밝기 무섭게 뛰쳐나올 것만 같다.
이제껏 나는 늘 다니던 길에서조차 벗어나기를 두려워했다. 학창 시절에는 등·하교 길 외에는 다녀 본 적이 없었고, 가끔 유일한 일탈은 광화문에 있는 대형 서점에서 온종일 선 채로 책을 읽다가 오는 게 다였다. 때로는 옆 동네가 궁금할 법도 하건만 버스 정류장을 한 정거장도 더 지나쳐 가 본 적이 없다. 방학에는 하도 집에만 있다가 개학 날에야 밖으로 나와서 별명이 백인이었다. 운전을 직접 하고 다니는 지금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어디를 가더라도 곧장 목적지에 도착해 볼일을 보고, 다시 그대로 갔던 길로 되돌아온다.
호기롭게 집을 나왔으나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집 근처 공원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운전석에 앉아있으니 늘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들이 떠오른다. 내게는 가족 말고도 짝꿍처럼 붙어 지내는 친한 언니가 있고, 소중한 단짝 친구가 있다. 언제든지 전화만 하면, 귀찮아하지 않고 달려 와 줄 귀한 인연들이다. 습관처럼 전화를 집어 든다. 아니다. 오늘은 나를 만나기 위해 나선 길이니만큼 최대한 연락을 자제하기로 한다.
갑자기 번쩍 기억이 났다. 단 한 번. 아주 오래전 혼자 여행을 떠났던 적이 있었다. 스무 살이 되던 해 2월 무렵 인천으로 가는 버스에 무작정 올라탔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최종 목적지는 연안부두였다. 정보에 어둡던 시절 무슨 용기로 길을 나섰는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또렷이 기억나는 장면은 서울에서 인천으로 가는 길의 풍경이다. 길 양옆으로 끝이 없이 늘어선 경인공업지대의 공장을 바라보며 썩 아름답지 않은 경치라서 실망한 게 아니라, 그동안 교과서에서 배운 내용들이 모두 사실이었다는 것에 적잖이 당황했었다.
연안부두에서 찬 바람을 맞으며 오랫동안 바라보았을 바다가 기억나지 않는다. 그때 종일토록 굶고 낯선 곳을 돌아다니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 아마도 스무 살의 눈으로 보고, 스무 살의 마음으로 세상을 느꼈겠지. 그래서 그날 이후 나는 조금 달라졌을까.
누군가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게 해 준다고 하면 난 정중히 거절할 것이다. 인생에서 아무것도 결정되지 않았던 그 시간이 어쩌면 많이 힘겨웠던 모양이다. 그나저나 갑자기 너무 피곤하다. 저녁 찬거리를 사서 얼른 집으로 가야겠다. 오랜만에 맛깔스러운 반찬을 만들어 놓고 가족들을 맞이해야지. 작전 변경이다. 오늘 나와의 여행 목적지는 하나로 마트다.
生의 한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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