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맘쯤이면 괴산 낙영산자락에 있는 천년고찰 공림사를 간다. 불자이기도 하지만 목적은 공림사 연못에 피어나는 연꽃 때문이다.
연을 품고 있는 연못이 넓지는 않지만 아담하고 소소하다. 하지만 그 소소함을 즐기려 해마다 공림사를 찾는다.
그뿐만 아니라 공림사에는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아름드리 느티나무들이 여러 그루가 서 있다. 나는 느티나무 아래 바윗돌에 앉아서 연꽃이 피어있는 못을 내려다보는 걸 좋아한다.
산에서 내려오는 바람이 느티나무 우듬지를 흔들어 바람을 일으키면 바람은 연못으로 내려가 진초록 연잎에서, 하얀 연꽃에 앉아 살랑거린다.
영산회상에서 법좌에 올라 부처님이 중생들을 향해 말없이 들어 보였던 염화시중 미소의 꽃이 연꽃이다.
아무도 그 뜻을 몰랐지만, 수제자 마하가섭만 부처님이 연꽃을 들어 올렸던 그 뜻을 알아 미소를 지었다고 한다.
처염상정(凄艶常情)이란 단어는 아함경이라는 불경에 나오는 문구이다. 진흙탕물 속에 뿌리를 내리고 살지만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향기롭고 깨끗하게 꽃을 피우는 연꽃을 이르는 표현으로 많이 쓰인다.
일 년 중 하루를 공림사에서 연꽃을 바라보며 처염상정이란 말을 되뇌고, 되뇌어 보지만 나하고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임이 분명함을 깨달을 뿐이다.
하지만 고고한 연꽃의 모습과 은은한 향기를 즐기는 순간만큼은 온갖 잡념이 사라지고 평화로워지니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작년에 덖어놓은 연꽃차를 우려 맛을 음미한다.
다른 꽃차와 달리 연꽃차를 마실 때는 저절로 눈을 지그시 감고 정신을 집중하게 된다.
온몸의 감각기관을 열어 차의 향기를 전달한다. 과하지도, 소란스럽지도 않은 조용하고 그윽한 향기이다.
처음 연꽃차를 마실 때는 향기를 즐길 줄도 마음을 열 줄도 몰랐다. 밋밋하고 그저 그런 향기로만 느껴졌다.
차로 덖는 긴 시간이 무색하리만큼 실망도 했다. 한번 두번 차로 우려 마시다 보니 연꽃의 향기가 그윽하게 느껴지고 차의 향기가 입안에 돌았다. 그제야 차의 품격이 느껴졌다.
연꽃차를 덖을 때는 송이채로 하는 때도 있지만, 송이채로 제다를 하는 것은 혼자 소소하게 즐길 수가 없다.
혼자서도 부담 없이 즐기려면 되도록 꽃잎을 하나씩 따서 잘라내어 덖는 것이 수월하고 좋다. 마음이 산란한 날이나 베란다에서 우암산 풍경 멍때리기를 할 때는 꼭 연꽃차를 우린다.
신기한 것이 눈을 지그시 감고 향기를 음미하며 호흡을 가다듬다 보면 산란했던 마음은 이내 평온해지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풍경 멍때리기를 하게 된다.
해마다 공림사로 연꽃을 보러 다니면서도 내가 연꽃으로 차를 제다하고 즐기게 될 줄은 몰랐다. 그저 바라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평화롭고 행복해서 그것만으로도 더 바랄 것이 없었다. 꽃을 좋아해서, 그 좋아하는 꽃이 그냥 시들어 버리는 것이 안타까워 제다를 배우다 보니 연꽃으로 차를 덖어 즐기는 행운도 누리며 살아가고 있다.
신심이 깊지 않은 불자인지라 감히 처염상정의 그 깊은 진리를 깨닫고 실천하며 살아갈 자신은 없다.
하지만 진흙탕 속에서도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깨끗하고 향기롭게 꽃을 피우는 연꽃을 해마다 바라보다 보면 내 안 어딘가에 묻어 있을 더러움을 씻어낼 마음의 눈이 열릴 기회가 올지 누가 알겠는가.
오늘도 나는 쏟아지는 빗소리에 산란한 마음을 다스리려 연꽃차를 다관에 넣고 뜨거운 물을 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