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에 놀라지 않는 사자같이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흙탕물에 젖지 않는 연꽃같이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라.
반갑습니다. 이곳 백두대간 속리산 화양구곡의 채운암에는 무더웠던 한여름이 지나가고 가을로 가는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이 시간에 탁마할 공안은 단도직입형 공안인 무문관 제14칙 남전참묘(南泉斬猫 )5.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남전선사가 답하지 못한다면 고양이 목을 쳐버리겠다는 상황에서는 얼른 생각하기에도 고양이를 죽게 내버려 두는 것보다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맞는 것일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수행승들은 이 말을 하는 순간에 이미 깨닫고 싶다는 욕망에 집착하고 있는 상황이 되어 버리게 되고 만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주목해야 할 점은 지금 이 상황에서 제자들에게 떠오르는 그 어떤 말도 단지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어떤 권위에 대한 인용에 불과하다는 겁니다. 이것 또한 그 어떤 것도 막힘(碍)이 없고, 무장무애(無障無?)와 스스로 존재한다는 자유자재(自由自在)를 이상적 경지로 보는 선가(禪家)의 관점에서 봤을 때에는 치명적인 어리석음이라는 겁니다.
그런데 딜레마는 남전 선사가 이 상황에서 무슨 말이라도 해보라고 외쳤다는 점입니다. 어떻게 해야할까요? 떠오르는 말은 결국 경전에 나와 있는 말들뿐이니, 그걸 말하면 고양이에 대한 집착이 경전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지는 악순환만 되풀이 될 것이고, 그렇다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게 되면 고양이가 죽는다는데 정말이지 난감하기 짝이 없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제 외출에서 돌아온 조주 선사는 이에 자신의 신발을 머리 위에 올리는 파격적인 행보를 보여줍니다. 그가 만약 그가 미친 것이 아니라면 그는 남전 선사의 질문과 그 딜레마를 제대로 이해였던 것이고, 그 답을 경전의 경구에서 가져와야 하는 것도 아니며 계율이라는 규범에서 찾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며, 이 또한 집착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있었던 겁니다.
조주 선사는 본디 신발이란 발에 싣는 것인데, 이것을 머리 위에 올림으로써 기존규범 자체에 대해 반항을 보여준 겁니다. 조주 선사만이 온전한 `나'로서 `나의 언어'를 가지고 대답할 수가 있었다는 말이지요. 이 맥락에서 남전 선사가 “만일 조주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고양이를 구할 수도 있었을 텐데…”라고 한 것이 고양이를 살리고 자 한 자비의 마음 따위와는 하등의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이 말은 끝에 붙이는 짤막한 유머이자 질문의 진정한 뜻을 다시 한 번 갈무리해주고자 남전 선사 자신이 던진 질문으로, 처음부터 고양이를 죽이느냐 마느냐의 문제가 아니고 불교의 불살생 계율에 집착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였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함의를 내포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럼 여기서 마치고 다음 시간에는 무문관 제14칙 남전참묘(南泉斬猫) 6을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지금 여기 무각스님과 함께하는 무문관 공안으로 보는 종횡무진 자유로운 선(禪)과 함께하는 모든 분들이 부디 보름달처럼 지극히 행복하시고 여일하시길 두 손 모아 기원드립니다.
무각 스님 괴산 채운암 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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