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부터 저는 호기심이 많은 아이였습니다. `왜'라는 질문은 입술 밖의 파열음으로 뱉어내 오해도 받고 별스럽다는 말도 들었으니까요. 물론 어른들께 말입니다.
참, 건강하시죠? 기별이 늦은 듯 하여 하고 싶은 말을 먼저 꺼냅니다. 심한 일교차에 아침마다 무엇을 입을까, 몸에게 무엇을 먹일까 생각하느라 사실 좀 피곤합니다. 생애처음 겪는 희한하고 낯선 가을을 지나고 있어요. 낮엔 따뜻한 햇볕 덕에 느슨해지기도 합니다. 여기저기 축제가 한창인데 심드렁 하는 자신을 보며 이것도 나이 탓으로 돌리고 말려고 합니다.
하던 얘길 계속 하자면 어른이 되어서는 호기심 보다는 합리적 의심을 합니다. 의심이 많은 것은 고도의 정신력이라고 생각해요. 비판과 의심 없이 받아들이기엔 세상이 복잡하고 험난해졌잖아요.
얼마 전, 『마음먹기』수업을 했습니다. 자기개발서 같기도 한 작품을 어른들은 매우 좋아했습니다. 공통적인 것은 나이 들어가며 대부분 더 이상 마음을 먹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저, 하루에 감사하고 하루치 근심으로 족하게 된다는 이들, 구태여 마음을 먹어가며 애쓰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선배들의 말씀을 들으면서 닮아야할지 반면교사 삼아야 할지 잠시 헷갈렸답니다. 한때는 고시에 합격하겠다는 다짐으로 절에 들어갔던 적도 있다고, 어느 때엔 전주에서 제일 큰 횟집을 하며 마음만 먹으면 전국의 돈을 다 쓸어 담을 만한 아이템을 갖고 있었는데 시대를 잘못만나 문을 닫게 되었다는 이야기, 차라리 자신을 바꾸는 게 가장 쉬웠다는 어르신은 자식이 마음대로 잘 안 커주더라는 회한의 한숨도 들었습니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보면 무엇이든 언제든 누구든 마음만 다르게 먹는다면 새로운 생의 문이 열리기도 한다는 것을 이분들도 알고 있는 듯 했지만 이제는 동력이 다해 밭고랑에 널부러진 낡은 경운기 같았습니다.
이런 분께 호기심을 가져보시라고, 의심하고 뜯어보며 시간을 촘촘하게 살아내 보시라고 말하는 것은 스스로 기만하라고 주문하는 것과 같지 않을까요.
선생님, 나이가 든다는 것은 호기심을 거두고 단단하게 먹었던 마음을 풀고 흐르듯이 사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이릅니다. 내가 나에게 이르는 길엔 나이도 끼어들고 환경도 봐야하고 내 마음도 살펴야 한다는 것이, 모든 것에 조심스럽게 생달걀 다루듯이 둘러봐야 한다는 것이 진심으로 나이 드는 모습인 것 같기도 했지요.
수업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문득 이들에게서 낙관(樂觀)적 관점을 낚아챈 스스로를 깨닫게 됩니다. 낙천(樂天)이 하늘이 내려주신 개인적인 기질이라면 낙관(樂觀)은 후천적으로 획득한, 잘 될 거라는 생각입니다. 낙관이란 의심스럽고, 불편하고, 도대체 왜 그러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지켜보며 잘되길 비는 마음 아닐까요.
이런 깨달음이 제 영혼을 훑고 지나갈 때 사소한 신비로움에 사로잡힙니다. 타인은 이미 알고 있겠지만 스스로 사유와 경험을 통해 알게 되는 세계는 더 또렷하게 보이고 가치 있어요.
이제, 스스로 헐거워졌다고 탓하지 않으려구요, 고도의 정신력으로 계속해서 의심을 거두지 않고 이것저것 따지고 묻겠지만 궁지에 몰아넣지는 않으려 합니다. 역설적으로 의심하기에 믿기도 합니다. 믿음이 의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믿음은 시시한 사건에 불과하지만 그 작은 것들의 인과관계를 알아채고 그것들의 결과를 기적이라고 말해줄 수 있는 일상의 소소한 신비입니다. 하여, 호기심과 의심을 넘어 믿음으로 왔을 때 느껴지는 생에 대한 신뢰와 은총은 더 없이 아름다운 것이 되는 것은 아닐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