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r.Jung의 호서문화유람
어렸을적 누구에게나 익숙하게 들어 본 경험이 있을 법한 ‘짝짜꿍’는 1929년 발간된 정순철의 동요작곡집 《갈잎피리》에 ‘우리아기 행진곡’이란 제목으로 실려 있던 국민동요이다.
정순철은 1901년 옥천군 청산면 교평리에서 청산현 통인이었던 정주현과 2대 동학교주였던 해월 최시형의 딸 최윤 사이에서 태어났다. 1894년 9월 최시형이 청산면 한곡리에서 기포령을 내린 후 역적의 딸로 몰려 옥천관아 감옥에 갇혀 있던 최윤은 옥천현감에 의해 정주현과 살게 되면서 그 사이에 정순철이 태어나게 된 것이다. 동요작가 정순철의 탄생은 격변기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참으로 기구한 인생의 출발이라 아니할 수 없다.
청산에서 보통학교를 다니던 정순철은 최시형 가족에 대한 손병희의 배려로 상경하여 가회동에 살면서 보성학교에 다녔다. 1917년 3대 동학교주 손병희의 셋째 사위 방정환과 최시형의 외손자 정순철이 만나면서 싹트기 시작한 우리나라 어린이운동은 동학의 인내천 사상에 근거를 둔 평등주의적 인간관에 기반을 둘 수 밖에 없었다. 1921년 둘은 ‘천도교소년회’를 조직하였고 1923년에는 방정환, 정순철, 손진태 등 당시 동경 유학생들을 중심으로 ‘색동회’가 창립되어 아동잡지 ‘어린이’를 창간하였다. 정순철의 ‘우리애기 행진곡’, ‘반달’의 윤극영, ‘오빠생각’의 박태준, ‘봉선화’의 홍난파와 함께 1920~30년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동요들이 ‘어린이’ 잡지에 실리게 되면서 우리나라 동요의 황금기를 맞는다.
이 때 동화구연하는 재주가 뛰어난 방정환은 이야기로, 정순철을 아동들을 위해 만든 동요를 매개로 많은 아이들을 만났다. 아이들을 ‘아해, 애녀석’으로 하대하던 것이 일반화 되어 있던 때 아동을 일컫는 ‘어린이’라는 말을 만들고, 또 어린이날 제정에 큰 역할을 한 것도 정순철이었다. 1931년 방정환 사후 암울했던 일제강점기 말기에 정순철은 음악교사라는 직분으로 동요와 동극을 하는 ‘녹양회’ 활동을 하다가 해방을 맞이 한다.
해방 이후 1946년 5월 1일에 어린이날을 부활했고, 그해 6월에는 해방후 첫 졸업식이 열리게 되었는데 당시만 해도 변변한 졸업식 노래 하나가 없던 시절이었다. 이 때 만든 노래가 윤석중 작사, 정순철 작곡의 ‘졸업식노래’였다.
졸업식장에서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를 부르며 졸업식장 전체를 눈물바다를 이루기도 하였고, 가사에 등장하는 ‘꽃다발’과 ‘물려받은 책’은 졸업식의 당연한 문화로 자리잡게 되었다. 이후 정순철은 윤극영, 윤석중과 함께 1947년부터 6‧25전쟁 전까지 매주 모여 ‘노래동무회’ 활동을 통해 동요창작과 보급에 몰두하다 9‧28 수복 때 납북되어 생사를 알 수 없게 된다.
‘아이들의 보다 나은 행복한 세상’을 꿈꾸며 동요의 작곡과 보급을 통해 불우했던 자신의 어린 시절을 긍정적으로 극복 승화한 정순철의 예술혼은 오늘날 옥천을 중심으로 조용한 울림이 되어 퍼지고 있다. 정순철기념사업회를 중심으로 2012년에는 정순철노래비를 건립하였고 또 2008년부터 매년 5월이 되면 지용제와 함께 ‘옥천 짝짜꿍전국동요제’ 개최하고 있다. 꽃피는 5월 옥천에 가면 ‘좌지용 우순철’을 만날 수 있다. 한편 그가 태어난 청산에는 정순철의 동요를 주제로 한 벽화거리가 조성되어 있다.
/문화경제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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