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역사기행
명포수! 번개장군! 의병장 한봉수 선생은 1884년 4월 18일 충청도 청주목 산외일면 세교리(현 충북 청주시 청원구 내수읍 세교리)의 가난한 농가에서 4대 독자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친을 여의고 가난하고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며 사격과 사냥에 남다른 자질이 있었다고 한다.
한봉수 의병장이 청주진위대 상등병 출신이라는 것은 근거가 없다. ‘독립운동사’ 제1권에는 ‘17세부터 총질만 하며 살아온 명포수 의병장’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한봉수 의병장은 1907년 9월 청주진위대 일등병 출신인 김규환과 함께 의병을 일으키기로 하고, 해산군인 100여명을 규합하여 의병진의 명칭을 ‘왜적구축대’라 칭했다. 이후 그는 청주, 청안, 미원 등 읍내 장터 일대에서 일본군을 공격하고, 유격전을 전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그는 부하 7, 8명과 함께 교묘하게 잠복해 체포를 모면하면서 수비대 및 경찰관과 수차례 교전했고, 1907년 9월 15일 미원에서 일제 수비대를 물리쳤다고 한다. 그리고 1908년 1월 9일 산외일면 세교리 장터를 습격하고, 교자동에서 일진회원 김홍식을 처단했다. 같은 해 6월 10일 우편행랑을 호위하며 진천군을 지나가던 일본군 헌병 상등병 사마자키 요시하루(島崎善治)를 습격해 처단했다.
1909년 중반에는 속리산으로 부대를 이동하여 그곳을 거점하여 경상북도 북부지방으로 이동하여 계속 활동했다. 일제 측 기록에 따르면, 그는 총 여섯 차례 우편물을 습격과 26회에 걸쳐 일본인 자산가와 친일파 인사, 밀정 및 일본군에게 의병의 위치를 알린 조선인들을 처단하고 군자금 및 무기를 노획했다. 그 후 경북 상주의 조운식 의병장과 연합하여 500명에 달하는 연합부대를 일시적으로 편성하기도 했다. 그는 한국 내의 모든 의병을 연해주에서 활동하고 있던 유인석과 연계하려 했다. 아마도 해외독립운동 기지를 구축하여 장기적인 독립운동을 계획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조운식이 체포되면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서울에 피신하고 있던 한봉수는 경찰 체포망이 좁혀오자 귀순을 요청했고, 결국 1910년 5월 15일 체포되어 교수형을 선고받았다. 1910년 일제의 강제합병과 이른바 ‘합방대사령’으로 사면되었다. 1919년 3·1운동 때는 괴산과 청주 지역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투옥되기도 하였다. 1963년 대한민국 건국공로훈장이 수여되었다. 한봉수는 1972년 12월 향년 90세로 타개하였다.
일제는 한봉수에 의해 처단된 사마자키 상등병의 순직비를 사망한 자리(충북 진천군 문백면 옥성리)에 세웠는데, 이 순직비는 해방된 후에도 남아 있었다. 1977년 문백면 주민들이 그 비를 끌어내리고 주민 성금으로 만든 ‘한봉수항일의거비’를 그 자리에 세웠다. 당시 주민들은 순직비를 깨부수려 했지만 암질이 너무 단단하여 깨뜨릴 수 없자 글자를 시멘트로 문질러 버리고 한봉수 항일의거비 아래에 세워두었다. 이곳은 의병장을 기리는 비와 의병장이 사살한 일본군 장교를 기리는 비가 함께 서 있는 유일한 장소다.
남의 나라를 침략하여 노략질을 일삼던 일제가 상징물로 세운 비석 위에 그들을 응징한 한봉수 의병장의 ‘승전비’가 함께 있는 것을 볼 수 있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특히 한봉수 의병장이 천수를 누리고 후손들이 복을 받아 손자가 대한민국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 것을 생각하면 선한 영향력은 역사 속에서 증명이 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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